●고려와 몽고의 접촉
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고려와 몽고의 접촉은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하여 이루어졌는데요
만주에 살고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을때에
고려가 몽고와 협력을 하여 거란군을 물리쳤습니다
몽고는 고려와 접촉한 후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는데요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고려와 몽고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몽고의 침입
고려에서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던
몽고의 사신이 국경 부근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고려에 침입해 왔습니다.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은 귀주에서 박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몽고군은 길을 바꾸어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였습니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하였는데요
몽고군은 각지에 감시관인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본국으로 물러갔습니다.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심하게 간섭을 해 오자
당시의 권력자였던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요구들을 단호히 거절하고 몽고에 대해 항전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몽고가 고려를 는 재차 침입하여 왔을 때에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윤후 부대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됩니다.
몽고군은 화의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해 왔지만 고려는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면서 나라를 지켰습니다.
몽고의 침입이 이루어지자 고려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하여
농민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면서 항전하도록 하였습니다.
몽고군이 충주성에 쳐들어왔을 때에 지광수 등은 끝까지 성을 지켰고요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조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몽고에 대한 항복을 거부하는 가운데 오랜 전쟁을 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몽고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려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몽고와의 전쟁이 진행이 되는 가운데 문화재의 소실도 이루어졌는데요
경주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의 대장경 판목 등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몽고와의 전쟁을 주장하던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항복을 마지막까지 거부를 하면서 몽고에 대한 항쟁을 하게 됩니다
삼별초 |
몽고에 대한 항복을 마지막까지 거부 |
강화도에서 근거지를 진도로 옮김 |
진도에서 배중손 사망 |
몽고에 대한 침입을 마지막까지 거부를 하면서
몽고에 대한 항쟁을 주장한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후 배중손이 죽은 후에는 제주도로 이동을 하여 항전을 하게 됩니다
●개경으로의 환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후에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이 회복되었습니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회복이 이루어진 후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습니다.
개경으로 환도하자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몽고에 대한 항복을 거부한 삼별초들은 경기도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습니다.
제2의 근거지인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의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는데요
항쟁을 하던 삼별초는 결국 고려와 몽고의 여⋅몽 연합군에 의해서 평정되었습니다.
삼별초 |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근거를 옮기면서 항정 |
몽고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있는 제주도에는 삼별초가 항쟁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요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는 현재 제주도 애월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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