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호족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책을 폈다. 그는 유력한 인사들에게 왕가 성을 내려 의사(擬似) 일가를 만들었다. 당시에 본관을 만드는 풍조가 일었는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왕건은 명주(오늘날의 강릉) 장군 순식에게 왕렴(王廉)이란 성명을 내렸고,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망명해 오자 왕계(王繼)란 성명을 내렸다. 이러면서 혈통이 다른 왕족이 급속히 늘었다.
다음은 혼맥을 통해 묶었다. 왕건은 종친의 딸들을 유력한 세력의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대광현도 종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맏사위로 삼기도 했다.
경순왕의 조카딸은 왕건의 부인이 되었다.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왕건은 임금이 되기 전에 두 왕비를 두었다.
한 사람은 개성 부근의 호족인 천궁의 딸 유씨로 그녀가 첫 아내이다. 그리고 그가 장수로 나주에 출정할 때 오가 성을 가진 평민의 딸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그는 오씨 처녀와 잠자리를 하면서도 자식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들(뒤의 혜종)이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아내로 맞이했다. 그의 아내로 호족이 아닌 경우는 오씨가 유일하다.
그는 지방을 쉴 새 없이 순회하면서
호족의 누이나 딸을 아내로 들였다.
그리하여 왕건은 27명의 부인을 두었다.
그녀들의 출신 지역은 전국에 고루 나누어져 있었다. 부인들의 호칭은 그 지역 이름을 따서 붙였지만 모두 부인이라 호칭하게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다.
앞에 두 왕비를 두었다고 하나 유씨는 조강지처요, 오씨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구분해 불렀던 것이다.
이렇듯 왕건은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통일 고려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호족세력과 불교세력을 통합하여 지원을 얻었고 새 이미지를 조작해 대중을 포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