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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과거제

by 산골지기 2016.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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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과거제는 무과가 없었고  조선의 과거제는 무과가 있었습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의 건의로 958년(광종 9)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창설하였고, 성종(成宗) 때 합격자를 우대하였다. 초기의 과거시험은 제술과(製述科:進士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醫卜科)를 두었으며, 1136년(인종 14)에 이르러 정비되었다. 제술과와 명경과는 문관 등용시험이었으나, 제술과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제술과의 합격자 수가 6,000여 명이나 되는데 비해 명경과 합격자는 450명 정도인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 점은 당시의 귀족들이 경학(經學)보다 문학을 숭상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잡과는 위의 양과 보다 그 격이 낮았다.

이 밖의 과거에는 승과(僧科:敎宗試와 禪宗試)가 있었으며, 무신(武臣)의 등용을 위한 무과(武科)는 1390년(공양왕 2)에 실시하였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여 거의 없었다. 과거의 응시자격은 양인(良人) 이상이면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민이나 승려의 자식은 응시할 수 없었다. 양인 이상은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농민은 사실상 응시하지 못하였다.

조선 시대의 과거 과목에는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가 있었다. 이 밖에 중인들이 보는 잡과(雜科)에 역관을 뽑는 역과(譯科), 의원을 뽑는 의과(醫科), 천문 지리를 맡아 보는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문과는 문관의 등용 자격 시험으로 가장 중시되어 대과(大科)라고도 하였다. 생원과와 진사과는 소과(小科)로 불렀다. 문과는 1차 시험인 초시(初試)와 2차 시험인 복시(覆試)가 있었다. 그리고 초시와 복시 모두 3장(場)이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세 과목의 시험을 치른 셈이다.

보통 초장(初場)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외거나 뜻을 풀이하였고, 중장(中場)에는 여러 종류의 문체 가운데 2편을 짓고,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33명의 합격자를 선발한 후, 이조(吏曹)로 보내 능력에 따라 벼슬에 임명하였다. 소과인 생원시와 진사시의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되고, 하급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3년에 한 번씩 보는 식년시(式年試)가 원칙이었으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 시험인 증광시(增廣試)나 알성시(謁聖試) 등의 별시(別試)도 자주 개설되었다. 후기에는 과거 시험이 너무 잦아, 뇌물을 써서 부정 합격하거나, 어렵사리 합격을 해도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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