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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구룡포 지명

by 산골지기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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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병리(石屛里)

남쪽으로 삼정리와, 북쪽으로 대보면 강사리에 접해 있는 해안 마을로서 두일포와 석병2개의 자연락이 1리와 2리를 이루고 있다. 바닷가에 기암괴석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1968년 구룡포예비군중대 11소대가 전국 예비군경진대회에서 우승하여 표창을 받은 기념으로 1969년에 세운 전국최우수 예비군소대기념비가 노적바우 옆에 세워져 있다.

☞ 석병(石屛)
마을을 끼고 있는 긴 해안선이 깎아 세운 듯한 암벽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아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석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마을 남쪽에는 길게 바다쪽으로 뻗은 송림을 배경으로 하여 폐교된 석병초등학교 터가 있다. 마을 남동쪽 바닷가에는 병풍모양을 하고, 끝이 뾰족 한 아흔아홉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하여'아흔아홉골짜기'라고도 불리는 병풍바위가 있다. 진등 동쪽에는 흔히 '봉우재'라고 부르는 대곶봉수대(大串熢燧臺)터가 있다. 이 봉수는 남쪽으로 뇌성산봉수, 북쪽으로 사지봉수에 응하였다 한다.
석병1리에는 우리나라 육지로서는 가장 동쪽끝 자락에 표석이 위치하고 있다.

☞ 두일포(斗日浦)
조선 숙종때의 명유(名儒)인 송시열선생이 장기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마치 말(斗)을 엎어 놓은 것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자형을 이루고 있어,두일포라 부르게 했다 하며, 흔히 '들포' 라고도 부른다.




■ 삼정리(三政里)  
   남쪽으로 구룡포와 북쪽으로 석병리에 접해 있는 바닷가의 경치가 아름다운 마을로서 1리에 해당하는 범진과 2,3리에 해당하는 삼정 등 2개의 자연부락을 관할하고 있다. 옛 목장성내에 목관공해 유지가 있다. 

☞ 범진(凡津)
원래 지대가 낮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바닷물이 자주 범람한다 하여, 혹은 나루터가 넓다고하여 범진이라 하였는데 '범늘' 이라고도 한다.

☞ 삼정(三政)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 하여, 또 다른 일설에는 마을의 지세가 좋아 3정승이 날 것 같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 서북쪽에는 고분이 산재한 순능(순능재라고도함)이란 이름의 야산이 있는데, 한 때 이 곳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었다가 20여년 전 이 마을이 태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게 되자 3년마다 벌이는 별신굿을 한 즉 이 재를 깎은데 원인이 있다 하므로 다시 조림을 한 일화가 있다. 이 마을 앞바다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고 하는 관풍대(觀風臺)라는 바위섬이 있는데, 육교가 가설되어 통행이 자유롭다.

 

 구룡포리(九龍浦里)  

   영일만을 형성하고 있는 범꼬리의 동쪽 해안선이 남쪽으로 내리 달리다가 응암산의 한줄기와 만나는 지점에서 활처럼 휘어져 구룡포만을 이루는데 이를 끼고 길다랗게 놓여 있는 마을이다. 읍소재지로서 우체국, 파출소, 단위농협, 영일수산업협동조합, 신협, 새마을금고 등의 관공서와 금융기관, 구룡포 초등학교, 구룡포동부초등학교,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 구룡포여자 중.종합고등학교 등의 각급 학교가 밀집돼 있다.

1923년에 방파제를 쌓고 부두를 만듦으로써 본격적인 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용두귀운(龍頭歸雲), 옥산반조(玉山返照), 주잠명월(珠岑明月), 항구장제(港口長堤), 유명조일(維溟朝日), 창주모연(滄珠暮煉), 우진화선(盂津畵船), 석문청풍(石門淸風)등 8가지를 구룡포팔경(八景)이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령이 늦봄에 각 마을에 순시하다가 지금의 용주리를 지날 때 갑자기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그 중 1마리가 떨어져 죽자 바닷물이 붉게 물들면서 폭풍우가 그친 일이 있는데, 9마리의 용이 승천한 포구라 하여 구룡포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용두산 아래에 깊은 소(沼가)있었는데, 이 소(沼)안에 살던 아홉 마리의 용이 동해 바다로 빠져나가면서 승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창주리(滄珠里),염창골

옛날 이 곳 해변(현재의 구룡포초등학교 자리)에 염전이 있었을 때 소금을 쌓아 두는 창고가 있었다하여 염창골이라 하다가, 그 뒤에 서늘한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창주리라고 불러왔다 한다. 1936 년 개설된 구룡포시장이 있으며 1925년에 설립된 구룡포교회와 1935년에 설립한 성덕심인당 이란 절이 있다. 1942년 읍승격시 구룡포1리와 2리 분리 되었다.

☞ 중앙리(中央里),도산리(桃山里)

구룡포리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리로 불려져 오고 있으며, 옛날 이곳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도산리라고도 한다. 현재의 구룡포3리와 4리에 해당되며, 1915년 세워진 용흥사라는 절이있다.

☞ 돌문(石門洞)

옛날의 장기목장성의 출입문인 돌문(石門)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돌문 혹은 석문리라 불려오고 있다. 돌문은 높이 11m, 폭 6m정도의 자연석 바위였는데, 매암산을 중심으로 방목해 놓았던 말을 해 질 무렵 몰이하여 이 문을 통과할 때 숫자를 세어 축사에 넣었다고 한다. 안전사고의 위험과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1988년 제거하였는데, 그 돌 일부는 읍사무소 정원에 있다. 3.4리에 해당한다.

☞ 장안리(長安里)

현 구룡포5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1953년 동리 분할 때 지형이 길다고 하여 장(長)자를 따고, 마을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안(安)자를 따서 장안리라 이름지었다 한다. 마을 뒤편 언덕위에는 충혼탑, 충혼각, 용왕당, 구룡포개척자유공탑 등이 있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충혼각은 1960년에 건립 된 호국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현재 중위 안대수 외 178위를 모시고 있다. 용왕당은 이지역의 풍어와 안전 조업을 비는 제당이다. 구룡포개척자유공탑은 일제 때 구룡포 개발에 공헌한 일본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인데, 해방 후 친일적 내용이 새겨져 있는 탑의 표면을 훼손하여 명문은 알아볼 수 없으나 폭 1.5m, 높이 5m나 되는 자연석의 탑신은 그대로 서 있다.

☞ 용주리(龍珠里), 사라끝(沙羅末)

구룡포만의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옛날 이 곳에 모래밭이 있었기 때문에 사라끝(沙羅末)이라 불려 왔으며, 마을 주민들이 풍어제를 올리기 위하여 인근 구룡포 5리 지역에 용왕당이라는 제당을 세우고 용주리라고 불렸는데, 마을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 구룡포6리에 해당하며, 동쪽 끝에는 1948년에 설립된 구룡포중,종합고등학교가 있다.

☞ 새골(大新里)

현 구룡포7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약 200년전 이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 새로 생긴 마을이라 뜻에서 새골이라 했는데, 1942년 읍 승격시에 마을을 크게 번창시킨다는 뜻에서 대신리(大新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구룡포해수욕장이 있으며, 수산물가공업체인 동원식품(주) 구룡포공장이 입주해 있다.

■ 눌태리(訥台里)  

   구룡포리 서쪽, 병포리 북쪽의 긴 골짜기 속에 4개의 자연부락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행정 구역상으로는 1리(큰동네,탯골,중태),2리(樂田)로 구분되어 있다. 본래 장기군 외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큰 동네, 약전, 태곡, 중곡, 광정, 눌방을 병합하고 눌방과 태곡의 이름을 따서 눌태리라 하여 창주면에 편입되었다.
눌태란 옛날 이 곳에 살았던 충신 한 분의 언어가 눌언(訥言)이므로 그렇게 지어졌다고도 하고, 그 충신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1979년 서북쪽 골짜기를 가로막은 눌태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못안쪽의 광정, 눌방에 살던 약 40호는 못 아래쪽의 마을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
☞ 약전(樂田), 구장터, 수페
눌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예로부터 이 마을에 약초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약전이라 불러 왔다. 한때 장기현 내북면 소재지였을 때 이 곳에 시장이 있었다가 1914년 내북면에 외북면이 통합되면서 창주리로 옮겨 왔는데, 이에 연유하여 구장터라고도 하며, 옛날에 이마을에 큰 숲이 있었다고 하여 수페라고도 한다. 1950년에 창립된 구룡포 천주교회가 있고, 최근에 지어진 구룡포읍 여성회관이 있으며, 수산물 가공공장이 많이 입주해 있다.

☞ 불미골, 중태(中台)
옛날 이 곳에 불미질('풀무질'의 방언)을 하던 곳이 있었다고 '불미골' 이라 불려 오고 있으며, 눌태리 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고도 하여 중태리라고도 한다.

☞ 탯골(台谷)
약전 북동쪽에 태봉이라는 산이 있는데, 이 산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옛날에 안사묵(安思?)이 세운 시원당(始源堂 ; '향악계종집' 이라고도 함)이라는 정자가 있어 선비들이 공부하거나 노인들의 쉬는 곳으로 이용되었는데 8.15광복 이후 없어졌다.

☞ 큰동네
읍 소재지에 인접해 약전이 지금과 같이 번창하기 전에는 눌태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는데 이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불미골, 탯골과 함께 순흥안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979년 이 곳에 눌태저수지가 건설되고 또 이 저수지가 구룡포읍 상수도 수원지화되면서 안쪽 골짜기와의 통로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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