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호랑이에 비유한다면 구룡포는 호랑이의 꼬리, 즉 등 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꼬리의 위쪽 끝 부분은 호미곶이지만, 동해와 만나는 한반도의 동쪽 끝은 구룡포 석병리(경도 129.35.10, 위도 36.02.51)다. 지방도 925번을 타고 구룡포 해안선을 훑으면 구룡포의 탄생을 짐작할 수 있는 자연의 기록을 만난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에 마치 용이 불을 막 내뿜은 듯 주상절리와 판상절리가 자리 잡고 있다. 용암이 급격하게 냉각 수축되면서 5, 6각형 모양의 현무암 조각들이 층을 이룬 것이다. 바다에서 용 10마리가 승천하다가 1마리가 떨어졌다는 구룡포의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신생대 화산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투명한 동해바다로 스며들고 있다.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의 경계에 위치한 다무포 앞바다는 고래 서식지로 유명하다. “고래는 울산한테 뺄껴부꼬, 대게는 영덕한테 뺄껴부꼬, 오징어는 울릉도한테 빼앗깄다 아이가. 구룡포는 과메기, 대게, 고래, 오징어 할 것 없이 어장이 어마어마해.” 구룡포에서 만난 한 어민이 구룡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장을 자랑하듯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바로 이 비옥한 구룡포 앞바다의 물숨이 일제강점기 기구한 역사가 시작된 원인이 되고야 만다.
![]() |
![]() |
1 일제강점기 당시 요리집(좌)이었던 일본인 가옥의 현재 모습(우) <이윤정기자> 2 한반도 남쪽 땅끝이 해남이라면, 동쪽 땅끝은 구룡포 석병리다. <이윤정기자> |
어업기지를 위한 구룡포 축항, 침탈 현장이 되다
“일제가 구룡포 앞바다에 축항을 한 거야. 그게 1920년대고. 일본인이 대량 어획을 하는 큰 배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여기 어업은 일본인이 다 장악했지. 그 뒤로 한국인은 무조건 일본인 밑에서 일하라는 거야.” 서상호(92)옹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 거의 한 세기를 구룡포에서 지낸 산증인이다. 아흔이 넘은 나이지만 서상호옹은 당시의 변화상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구룡포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용한 어촌마을이었다. 어부 이외에는 가족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나가는 정도였다. 일제강점기가 되자 구룡포는 최적의 어업기지로 떠올랐다. ‘도가와 야사브로’라는 일본인 수산업자가 조선총독부를 설득해 구룡포에 축항을 제안한 것이다. 큰 배가 정박할 곳이 생기자 수산업에 종사하던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몰려왔다. 방파제를 쌓아 생긴 새로운 땅에는 일식가옥이 빼곡히 들어섰다. 현재 구룡포우체국 옆쪽 골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인 가옥거리’가 그것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100여 채 남아있던 일본인가옥은 현재 50채가량 남았다. 거리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이 붙어 있어 현재 모습과 비교하며 둘러볼 수 있다. 집 내부에는 다다미는 물론, 일본 잡지로 도배한 방문, 후지산이 그려져 있는 유리창 등 일제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의 중심부에는 구룡포공원이 있다. 공원에 서면 구룡포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원래 일본인이 세운 신사와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가 있던 곳이다. 해방 이후 구룡포 청년들로 구성된 대한청년단 30여 명은 신사를 부수고 송덕비에는 시멘트를 부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서상호옹은 “일제강점기에 친구는 군대로 징집되고 마을 처녀들은 정신대 끌려갔어. 해방되고 일본사람이 다 떠나간 그해 가을에, 우리는 ‘왜색일소’를 외치면서 신사를 해체하고 송덕비에 새겨진 도가와 비문에 시멘트를 부은 거야”라고 설명했다. 현재 구룡포공원에는 대한민국 순국선열을 기리는 ‘충혼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최근 마을에는 ‘도가와 야사브로 송덕비’를 다시 복원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민족에게는 ‘침탈의 역사’가 일본인에게는 ‘번영의 역사’로 비칠지 모른다.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가 ‘침탈의 역사에 대한 뉘우침과 교훈’으로 남길 바란다는 주민들의 당부가 나오는 이유다.
구룡포 역사 따라 물길 따라, 일주일이 부족하죠
구룡포는 선사시대 유적부터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의 역사가 이 물길에 숨어 있다.
조선 말기까지 말을 기르던 목장의 흔적을 찾는 것도 구룡포 여행의 백미다.
말을 가두기 위한 돌울타리가 구룡포에서 눌태 구릉지, 응암산, 공개산 서북쪽을 걸쳐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8km의 장기반도를 가로지르고 있다.
여지도, 경주도회자통지도 등 고지도에도 나오는 돌울타리는 길이 12km, 높이가 3m에 달했으며 아직까지 약 5.6km의 구간이 남아 있다.
목장 내에는 말을 물 먹이는 못이 50군데, 말이 눈과 비를 피하는 마구 19채, 목장 내 근무 인원은 141명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기까지 운영되던 대규모 목장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완전히 폐쇄되었다.
구룡포 염창골에서 시작해 응암산, 매암산, 체력단련장을 거쳐 다시 구룡포해수욕장까지의 말봉재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말목장성’이라 불리는 돌울타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까지의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말봉재 정자에 올라서면 우리 땅 동쪽의 눈부신 어항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구룡포해수욕장 인근의 주상절리, 대보면과 구룡포읍 경계에 위치한 고인돌, ‘목선(나무배)’을 만들던 조선소,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와 머구리(해남), 하루 세 번 어판장이 열리는 구룡포항의 모습은 너울대는 동쪽 바다의 매력을 한없이 부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