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으로 겨우 버틸 뿐이었다. 하지만 명의 참전과 뒤이은 조선 명 연합군의 평양 탈환으로 전세가 일시적으로 역전되었고, 그 후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강화 협상이 일본의 과도한 요구로 결렬된 후, 다시 정유 전쟁(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였고,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났다 명의 참전으로 임진 정유 전쟁은 동아시아 삼국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 때문에 전쟁을 전후하여 동아시아 국제 정세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임진 전쟁의 위기를 넘긴 조선에서는 양반 사대부의 지배 체제가 더욱 확고해졌다.
외적의 침입을 계기로 사회의 여러 모순이 덮어졌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재건의 기회도 주어졌기 때문이다.
명은‘베이징의 울타리’인 요동을 보호하는 것이 참전의 주요 목적이었지만, 조공국을 보호하여 중화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조선의 지배층은 이를 ‘재조지은’으로 받아들였다.
16세기 후반, 만주에서는 명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독립하여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누르하치는 임진 전쟁의 여파로 명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만주족을 통일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한 후 요동을 포함한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 후금은 2대 홍타이지 때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의 자리를 차지하고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임진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재정비하고 불에 탄 궁궐과 성곽을 수리하는 등 재건을 서두르는 한편으로, 임진 전쟁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을 고려하여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서인 일파가 그의 집권과 대외 정책에 반감을 품고 일으킨 정변(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조선이 모문룡을 지원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명 배금 정책을 내세우자,
후금의 홍타이지가 팔기병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정묘 전쟁).
그러나 후방을 염려한 후금이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철수함으로써 전쟁은 2개월여 만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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