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은 이 나라들과 적극적으로 화친을 추진함으로써 자기 나라에 대한 적대적 행동을 방지하고자 하였는데, 주변국에 빈번하게 *화번 공주를 보낸 것이 거기에 해당한다.
유목 민족 국가들과 달리, 신라와 발해, 일본 등은 당 중심의 책봉과 조공 관계를 받아 들였다.
국내의 통합을 유지하고 대외적인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며 , 당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면 책봉 조공 관계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당의 관계가 안정되고 사신과 유학생, 승려,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면서, 산둥반도를 비롯한 당의 동쪽 해안 지역에 신라방이 세워졌다. 신라방에는 신라소, 신라원 등이 있어 신라인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발해는 문왕 때부터 당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육로와 해로를 통해 당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다.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발해관을 설치하여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일본은 7세기에 견수사를 파견하면서 중원 국가와의 교류에 나섰고, 당이 들어선 이후에는 200년 동안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과 신라, 발해, 일본 사이에 맺어진 책봉 조공 관계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어긋날 경우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관계였다. 어느 경우에도 각국이 가장 우선으로 여긴 것은 자국의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와 발해가 당과 책봉 조공 관계를 맺었지만, 당의 침략에 대해 강력하게 맞서 승리를 쟁취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도 9세기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지하였는데, 그 후 일본에서는 외래 문물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가 발달하였다.
‘왕회도’는 당의 화가 염립본이 양의 소역(蕭繹, 후에 원제(元帝)로 즉위하였다.)이 그린 양직공도를 폭 28.1cm, 길이 238.1cm의 비단에 모사한 그림으로, 양에 조공 온 총 24개국 26명의 사신의 모습이 실려 있다. 조우관을 쓴 고구려의 사신과 맨발의 왜 사신의 모습이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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