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랜튼 대부인은 그의 가족과 아펜젤러 가족 일행과 함께 1885년 2월 3일 아라빅호(Arabic)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선교사 일행은 한국 선교사업 관리자로 임명된 매클레이의 환영과 안내를 받으며 한국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일본에는 이수정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유학생 교인들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외에 갑신정변(1884. 12. 4)의 실패로 일본에 정치적 망명을 해 온 개화파지도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김옥균․서광범․홍영식․서재필․유성준 등이었다. 이들은 서구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들을 통해 한국말을 익혔으며 한국의 정치․문화적 상황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885년 3월 5일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매클레이의 집에서 첫 감리교 한국 선교사 회의가 열렸다. 참석한 사람은 매클레이를 비롯하여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튼 부부, 스크랜튼 대부인 등 모두 6명이었다. 시편 121편과 132편이 낭독되었고 기도와 찬송으로 모임이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당시 한국의 국내 사정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하여 그다지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매클레이 박사는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개척 선교단 일행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그 일행을 나누도록 하였다.
먼저 아펜젤러 부부가 3월 31일 나가사키를 떠났다.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동행한 이들은 4월 5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서울 분위기가 아직 풀리지 않아 외국인 여성이 거리에 나서면 봉변을 당할 위험도 있다는 미국 공사의 충고 때문에 4월 13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2차로 스크랜튼이 내한을 시도하여 1885년 5월 30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1개월 전과는 사태가 많이 달라져서 서울 입성을 중단시키는 요인은 사라졌고, 스크랜튼은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서울에 입성한 스크랜튼은 먼저 들어와 있던 장로교 선교사 알렌이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에 남아있던 스크랜튼 대부인은 1885년 6월 8일 며느리와 어린 손녀와 함께 요코하마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1885년 6월 20일 아펜젤러 부부와 새로운 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W. J. Heron)부부와 함께 내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