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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대

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과 황조가

by 산골지기 202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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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은 후에 두 희()에게 장가들었는요

두희의 이름은 화희와 치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국통감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고구려 왕비 송씨(松氏)가 훙()하였다. 왕이 다시 두 희()에게 장가들었는데,

화희(禾姬)는 골천인(鶻川人)이고 치희(雉姬)는 한인(漢人)이었다.

두 희가 총애를 받으려고 다투므로, 왕이 동서(東西)에 두 궁()을 짓고 그들을 있게 하였는데

, 뒤에 왕이 사냥 나가서 7일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두 여인이 서로 질투하다가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한가(漢家)의 비녀(婢女)가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하니,

치희가 부끄러워 한탄하며 도망하여 돌아갔는데,

왕이 친히 그를 뒤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황조가와 관련한 동국통감의 기록을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Queen Song of Goguryeo was reigned. The king again married Du Hui,

Hua Hui (禾姬) was a Golcheon (鶻川人) and Chi Hui (雉姬) was a Han (漢人).

As the two men quarreled for favor, the king built two palaces in the east and west, and let them stay.

, and when the king went out hunting and did not return until seven days,

The two women were jealous of each other, and Hwa-hee rebuked Chi-hee, saying,

"How can the lady of the Han family be so rude?" Harney,

Chi Hee was ashamed and lamented and ran away,

The king himself followed him, but Chi Hui did not return.


황조가와 관련된 일화에서 유리왕의 두 후실은 화희와 치희였는데요

화희(禾姬)는 골천인(鶻川人)이었고요 치희(雉姬)는 한인(漢人)이었습니다

유리왕의 두 후실
화희--- 골천인
치희--- 한인

유리왕의 두 후실인 화희는 고구려의 토착인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토착세력이 나름 세력을 발휘하였다고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유리왕은 치희를 잃은 후에 황조가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는 4언시인데요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를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울사 이내 몸은뉘와 함께 돌아갈꼬.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Those orioles are right with each other.

Soon I will be lonely,

and my body will return with me.

우리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시가
공무도하가
황조가
정읍사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은 공무도하가, 정읍사와 함꼐 우리나라 초기의 대표적인 시가입니다.

월간중앙 (joins.com)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 ‘황조가’ 노랫말처럼 살다 간 고구려 유리왕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jmagazine.joins.com

 

황조가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가

 원가는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4언 4구의 한역시와 창작동기가 전함.

Kestor
A poem written by the 2nd King Yuri of Goguryeo
 The original price is not conveyed, but the "Samguk Sagi" Goguryeo Bongi Yuri dynasty was given by the 4th and 4th districts of Hanyeok City and Chang Dong-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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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와 공무도하가

황조가에 비해서 조금 일찍 지어진 시가로 공무도하가가 있었습니다.

황조가와 공무도하가
황조가 개인 서정시
공무도하가 집단 가요

 

황조가에 비해서 조금 일찍 지어진 시가인 공무도하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임은 마침내 물을 건너시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공무도하가는 집단가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서정시는 유리왕인 지은 시가인 황조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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