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현재 만주의 북쪽 지역인 송화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한민족의 고대국가인데요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된 나라 입니다.
주몽이 부여에서 왕자들의 질투를 받아 죽을 위험에 처하니 부여를 떠나
졸본부여(고구려)를 세우고,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고구려 2대왕)가 오니,
찬밥 신세가 된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한반도로 내려가서
각각 인천(미추홀)에 비류국, 한성(위례)에 백제국을 세웁니다.
후에 부여, 비류국, 백제의 위례지역, 동예, 옥저는 고구려에 흡수가 됩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에 기록된 부여
후한서에서는 부여는 고려의 북쪽, 읍루의 남쪽에 있었다고 하였고요
후한(後漢) 때부터 중국에 조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후한서에 기록된 부여관련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광무제(漢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알현하였고
, 25년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는데,
광무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이에 사신이 해마다 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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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는 부여는 후한 때부터 중국에 조공하였다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부여는 고려의 북쪽, 읍루의 남쪽에 있는데,
후한(後漢) 때부터 중국에 조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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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낙랑을 침범하기도 하였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5년(111)에 부여 왕이 비로소 보병과 기병 7, 8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침략하여 관원과 백성을 살해하였다. 그 뒤에 다시 귀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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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에 기록된 부여과 관련된 내용
후한서에 기록된 부여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녕(永寧) 원년(120) 12월에 부여에서 맏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한나라 궁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印綬)와 금채(金綵)를 하사하였다.
★연광(延光) 원년(122) 2월에 부여 왕이 아들을 부여 왕의 아들 위구태이다.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현도를 구원해 고구려, 마한, 예, 맥을 격파하였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원년(136) 정월에 부여 왕이 경사(京師)에 와서 조회하자
순제가 황문고취(黃門鼓吹)와 각저희(角牴戱)를 보이게 하고 전송하였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4년(161) 12월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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