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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고려 예종시기... 여진족과의 외교정책

by 산골지기 2018.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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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예종시기에는 여진족과의 외교정책이 고려 국정의 주요한 과제였다.
예종은 숙종의 아들인데 당시 대표적인 문벌귀족 세력은 윤관이었다.
숙종은 인주이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인주이씨와 외척관계를 맺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다.

여  진  족

 

 만주 동북부에 살던 흑수말갈의 후예.

 

수, 당 대에 말갈로 불렸고 이후 만주족이라 불림

 



숙종은 인주이씨 세력과 외척관계를 맺지 않는대신 윤관과 협력하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윤관은 숙종당시에 고려의 최고 벼슬인 문하시중에 있었다. 윤관은 송나라에 가서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이를 공식화시키는 일을 하였는데 이일을 수행한 이후 윤관은 숙종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였다.

숙종이 죽은 이후 왕으로 즉위한 예종은 숙종 사후 모든것을 윤관에 의지했다. 때문에 권력 내부에서는 윤관에 대한 상당한 경제가 필요했고, 예종으로서도 관료들의 윤관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종은 윤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인주 이씨의 대부인 이자겸과 손을 잡았다.

윤관은 북쪽에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여진족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편성된 군대인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족의 위협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별무반의 주력은 기병중심으로 편성된 신기군이었는데 여진족을 토벌할 당시에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윤관은 함경남도 지역에 동북 9성도 축조하였는데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으며 동북9성의 위치가 함흥평야 주변이 아니라 두만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윤관의 여진에 대한 정책은 우리민족이 자주의식을 잘 보여주는 정책이라고 할수가 있었는데  이자겸 세력이 부상을 하면서 윤관의 여진족에 대한 정책도 강한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결국 이자겸 세력을 비롯한 신진관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윤관이 수립하였던 여진에 대한 정책도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예종은 1109년 7월에 선정전 남문에서 여진의 사신 료불을 접견하고 동북9성을 돌려준다고 발표를 하게된 것이다. 결국 동북 9성은 축조된지 1년만에 여진에게 돌려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고려는 인종 4년 3월에 개최된 백관회의에서 금에대한 사대외교를 결정하게된다.
백관회의의 결정에 따러서 동북9성은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이자겸은 여진에 대한 사대외교를 펼치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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