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는 말 그대로 틈만 있으면 우리 해안에 나타나서 약탈행위를 일삼았는데요 우리나라의 허점이 많을수록 침략 횟수가 많았습니다.
고려시대에는 1년에 50번 고려해안에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왜구의 침탈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고려말인데요 이때에는 왜구침략의 너무 극심해서 수도를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겨야한다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 였습니다
고려말에는 왜구 침략에 공을 세운 이성계가 최영등이 신흥 무인세력으로 많은 활약을 하게 됩니다
왜구(倭寇, 일본어: 倭寇, 영어: Wakou, Japanese dwarf pirates)는 통상적으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밀무역을 행하던 무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왜구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한반도와 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이키 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은 고려와 원나라 침략 (1274년 및 1281년) 이후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통상로까지 막히자 복수심과 생계를 위해 해적질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왜구의 시초이다. 이처럼 초기 왜구의 구성원들은 가난한 규슈의 농민들이었다.
이후 왜구는 거대한 밀무역 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직화되고 거대화 되었다. 이는 배후에 밀무역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규슈와 시코쿠 일부 지역 영주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에는 한반도와 중국 남부 해안가를 따라 단순 약탈 위주로 활동하였으나 후에 노예 매매와 밀무역 등으로 큰 이익을 남기는 등 대규모로 기업화 되어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게 된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왜구가 특히 극성을 부린 것은 당시 일본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1192~1333년)가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후에 들어선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는 밀무역으로 인한 이익 때문에 이를 눈감아주었고, 쇼군가의 힘이 약해 지방 영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명나라 시대(1368~1644년)에 남방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여 왜구에 의하여 자주 점령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구의 침략인 바,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국가 기반은 흔들렸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는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여 왜구가 거의 근절되었다.
이 때 왜구가 감소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적극적인 왜구 근절 노력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규슈 영주와 막부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반도 해역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삼국 시대에도 왜구가 신라를 침입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침입한 왜구는 가야와 왜의 연합군으로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왜구와는 성격이 다른 왜국에서 정식 파견한 정규군이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신라구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확인된 바는 없다.
주된 약탈물은 식량이었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한성으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 규모는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나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1223년부터 1392년까지 169년간 총 529회의 침입이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침구 기사가 312건이 나온다.
이 때문에 현재에도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대만)을 비롯한 중화권에선 현재까지도 왜구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을 비하하거나 폄하하는 대표적인 멸칭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