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은 행정 기구를 통해서도 고려를 간섭하였는데, 정동행성이 대표적이었다. 원은 외지 통치나 대규모 군사 행동 등을 위해 여러 가지 성격의 행성(行省)을 설치하였는데, 정동행성은 정동(征東), 일본을 원정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정동행성은 두 차례의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존속을 했는데 여러차례에 걸쳐서 설치와 폐지를 반복했다.
1285년(충렬왕 11)에 다시 설치된 뒤에는 계속 유지되었다. 정동행성의 책임자에 해당하는 좌승상에는 고려왕이 임명되었고, 하위직도 대부분 고려인이었다.
원은 고려와 강화한 이후 한반도의 서북면 일대에는 동녕부를 설치하고, 동북면 일대에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탐라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원의 직할 영역으로 삼아 직접 지배하였다.
쌍성총관부는 동녕부보다 앞선 1258년에 설치되었다.
동녕부는 곧 고려에 반환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이 지역은 여진족이 다수 거주하는 등 민족 구성과 역사가 복잡하고, 원이 고려를 침략할 때 길목의 역할을 하였다.
몽골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투항하는 자들도 나타났으며, 여러 지역이 원에 항복하여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
원은 철령을 경계로 고려 출신으로 몽골에 항복한 조휘를 쌍성총관부 총관으로 삼고,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고 따로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고려는 원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1287년(충렬왕 13) 쌍성총관부의 반환을 요구하여 일부 지역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1356년(공민왕 5)에 이 지역의 유력자인 이자춘, 조돈 등의 협력으로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이후 고려는 마천령 이북까지 진출하였다.
고려는 원과 강화한 이후 원의 부마국이 되어 정치적으로 간섭을 받았고, 공물을 바쳐야 하였다.
여자들도 공녀로 원에 끌려가게 되었다.
공녀가 처음 시작된 것은 1274년(원종 15) 원이
투항한 남송의 중국인에게 처를 얻어 주기 위하여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녀 140여 명을 요구하면서부터이다.
고려는 ‘결혼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고 전국에서
여성을 선발해 공녀를 바쳤다.
그 후에도 고려 여인들이 몽골 남성에게 인기가 있어 원은 공녀의 징발을 계속하였다. 더욱이 고려 지배층은 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공녀 색출에 적극 협조하기도 하였다.
공녀의 대상으로 원은 왕족이나 귀족, 관리의 딸 등 양가의 처녀를 요구하였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의 딸이었다. 지배층 출신의 공녀는 황제의 후궁, 귀족의 처첩이 되어 기황후와 같이 출세하는 경우가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의 딸은 군인의 처, 궁녀나 잡역부가 되어 고달픈 생활을 하였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시행은 고려의 권력 중심이 호족에서 신라 6두품 계열로 넘어가게 되는 원인이 되는데 당시 신라 6두품 계열은 학문으로 고려 발전에 이바지 한 인물들이 많았다.
최지몽, 최승로와 같은 이들이 대표적인 신라 6두품 계열 인물 이들에 의해 고려는 성종 때부터 왕조의 면모를 가추고, 과거로 관리에 오르는 인물들을 즉 문인세력 중심으로 고려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무신정변을 통하여 고려의 실질적인 권력을 무인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때 정변을 참여한 무인과 그의 측근 및 가솔 그리고 무인정권에 참여하거나 등용된 문벌을 무신정변 이후 권문세족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원 간섭기의 집권층은 권문세족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문벌 귀족이나 무신 정권의 지배자들에 비해 다양한 출신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권문세족은 대체로 문벌 귀족 가문 중 지속해서 권력을 유지하던 세력, 무신 정권 시대에 무신으로 득세한 가문, 무신 정변 이후 새로운 관료로 성장한 가문, 환관, 응방의 관리, 통역관 등 원 간섭기에 새롭게 성장한 세력 등이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음서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세습하였다.
또한, 원의 세력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권문세족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어 고려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