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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 홍경래

by 산골지기 2016.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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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는 《조선왕조실록》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세도정권의 부패, 삼정(三政)의 문란 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에 저항해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설 속의 영웅이며 민중의 지도자였다.

백성들은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의 사후 그를 흉내 낸 크고 작은 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홍경래는 수많은 농민봉기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른세 살의 짧은 생에도 역사 속에 엄청난 삶의 자취를 남긴 셈이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태어났다. 외숙부인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웠는데 어렸을 때부터 힘이 세고 총명해서 동네에서는 이름난 소년이었다.

유학원은 그의 총명함을 아꼈으나 어린애답지 않은 야심가적인 기질을 발견하고 그의 앞날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권은 홍경래가 쓴 글귀를 보고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돌려보냈다. “가을 바람 불 때 역수의 장사는 주먹을 들어 대낮에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를 노린다.”라는 글귀였는데, 이는 《사략(史略)》에 나오는 것으로 형가(刑家)가 진시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고사를 인용한 글이었다.

유학권은 그의 부모에게 “경래의 재능은 비범하나 그 뜻이 순수하지 않으므로 각별한 지도가 필요하다.”라는 당부의 글을 함께 보냈다.

그는 이후 독학으로 공부했는데 《사기》, 《병서》 등을 즐겨 읽었고 술법과 풍수지리에도 몰두했다. 또 용력과 무예도 부지런히 갈고 닦았다. 사람들은 학식이 높고 정의감이 넘치는 데에다 성품도 쾌활한 그를 믿고 따랐다고 한다.

그는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실력보다는 문벌과 혈연으로 인재를 뽑는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전국을 떠돌며 술수를 익히고 풍수를 배워 지관(地官) 노릇으로 생계를 이었다.

조선은 초기부터 서북 지역 사람을

차별하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이는 북쪽에 여진족 등이 섞여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북쪽 사람들을 오랑캐로 천대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조선의 정권을 잡은 이들은 주로 영남 지방 출신이었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 심해졌는데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평안도 출신인 홍경래는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게다가 정조가 세상을 뜨고 순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김씨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자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는 이렇게 각지를 떠도는 동안 지배층의 부패상과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을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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