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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러일전쟁 이후의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1907년 4월 극비리에 서울을 출발한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을 만나 6월 4일 그와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이위종을 만났다.
먼저 이준·이상설·이위종 3명의 특사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 주최의 주창자이며 의장국인 러시아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고 보름이 넘도록 이범진과 함께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6월 19일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뒤 '장서'와 그 부속 문서인 '일인불법행위' 1권을 프랑스어로 인쇄했다.
같은 달 25일에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하여, 28일 장서와 문서를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7월 9일 밀사들은 우선 만국평화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한국의 공식 대표로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넬리도프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을 권하여 곧 외무장관을 방문했으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나지도 못했다.
이에 영국·미국·프랑스·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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