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사건은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인해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에 대항하고자 제2 국민병을 편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국민방위군이다.
최초에 대동청년단 단장 김윤근을 육군 준장에 임명한 뒤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추가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부사령관에는 독립운동가 출신 윤익헌이 대령으로 특별 임명된 뒤 보직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에게 군수보급, 물자를 지급해야 할 것을 고급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를 부정 착복, 횡령하여 수많은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빼돌려 부정 착복, 공금횡령을 저질러
본래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다.
즉 국민방위군 병력을 약 50만 명으로 잡으면 1개 교육대당 1만 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이었는데, 그러나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돌려차기'식으로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김해로 가라 하고, 김해의 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하고, 진주의 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고 하는식의 수법으로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정부에서 지급한 예산과 식량을 빼돌려 부정 착복, 공금횡령을 저질렀던 것이다.
'우리 역사 > 근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법개헌 (0) | 2016.09.10 |
---|---|
조선족 (0) | 2016.09.08 |
헤이그 밀사 (0) | 2016.08.24 |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전 우리나라 (0) | 2016.08.22 |
독립협회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던 황성신문 (0) | 2016.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