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은 춘추ㆍ전국 시대에 각 제후국이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벽을 진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이는 이후 유목 민족과 한족의 경계선이 되었다.
진 대에 개축한 장성은 대부분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며, 현재의 성벽은 15세기 명 대에 쌓은 것이었다.
만리장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보수와 개축을 거듭하였는데, 이는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이 진뿐만 아니라 이후 왕조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려 준다.
흉노는 북방의 유목 민족으로,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기원전 3세기 무렵에서 기원전 1세기 말까지 활약하였다. 흉노가 3~4세기 무렵에 유럽으로 이동한 훈족과 동일한 종족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무렵
흉노의 두만 선우(單于: ‘대천자’라는 뜻)는
몽골 고원의 부족들을 연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두만의 아들인 묵특이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흉노의 세력은 크게 확대되어 진은 만리장성을 개축하여 흉노를 막으려 하였다.
진을 이은 한은 통일 이후 흉노에게 각종 물품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흉노는 한의 무제가 즉위한 이후 한의 압박으로 쇠퇴하였다.
진(秦)의 제31대 왕으로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린다. ‘황제’는 찬란히 빛나는 상제(上帝)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신격화하려 하였던 시황제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 이름은 덕(德)은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3황(皇)에 버금가고, 공(功)은 5제(帝)를 능가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
황제의 도장을 ‘옥새(玉璽)’라 부른 것, ‘짐(朕)’이라는 황제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1인칭 명사, ‘폐하(陛下)’라는 호칭 등도 모두 시황제가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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