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은 신라에 귀국한 후 당나라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지었던 글들을 헌강왕에게 바쳤다.
당나라 생활 당시에 저작한 《계원필경》 《중산복궤집(中山覆섣集)》 《시부집(詩賦集)》 등 28권을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다.
그러나 아쉽게 《중산복궤집》과 《시부집》 등 8권은 전하지 않고 《계원필경》 20권만이 전한다.
계원필경은 모두 20권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권1에 <하개연호표(賀改年號表)> 등 표(表) 10편,
권2에 <사가태위표(謝加太尉表)> 등 표 10편,
권3∼4에 <사조장(謝詔狀)> 등 장(狀) 20편,
권5에 <주유황소(奏誘黃巢) 등 주장(奏狀) 10편,
권6에 <하입만사회장(賀入蠻使廻狀)> 등 10편,
권7∼10에 <활주도통왕령공(滑州都統王令公)> 등 별지(別紙) 80편,
권11에 <격황소서(檄黃巢書)> 등 격문(檄文) 4편과 <답절서주사공서(答浙西周司空書)> 등 서(書) 6편,
권12에 <제주허칙위곡(趙州許勅委曲)> 등 위곡(委曲) 20편,
권13에 거첩(擧牒) 25편과 <내행묵칙첩사(內行墨勅牒詞)> 5편,
권14에 거첩 25편,
권15에 <응천절재사(應天節齋詞)> 등 15편,
권16에 제문(祭文)·서(書)·기(記)·소(疏) 등 10편,
권17에 <초투헌태위계(初投獻太尉啓)> 등 10편과 7절기덕시(七絶記德詩) 30수,
권18에 서장(書狀)·서계(書啓) 등 25편,
권19에 <상좌주상서별지(上座主尙書別紙)> 등 별지 ·장계(狀啓)·잡서(雜書) 등 20편,
권20에 장계 ·별지 ·제문 등 10편과 <진정상태위시(陣情上太尉詩)> 등 시 30수가 수록되어 있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지은 좋은글들만이 모여있는 동양 최고(最古)의 문집이라 할 수 있다. 권11에 수록된 <격황소서>는 황소(黃巢)가 이것을 읽고 기겁을 하였다는 이로하는 유명하다.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은 인삼(人蔘)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고,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베트남 역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있다.
또한 당나라 시대 전란의 역사와 남쪽의 국가들과 동쪽의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기술하면서 오늘날 아시아 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모두 사륙변려체(四六폿儷體)의 명문으로 되어 있는데 뛰어난 문장력은 한문학의 금자탑을 세움과 동시에 후세의 한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경상북도 군위가 삼국유사를 지역의 문화아이콘으로 만들어가고 있는데 최치원의 계원필경도 우리민족과 동사이시아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할수 있겠다.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의 뜻을 살펴보기로 하면 계원(桂苑)은 문장가들이 모인 곳을 의미하고 , 필경(筆耕)은 군대 막사에서 거주하면서 문필로 먹고살았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문집에는 최치원이 고대 동아시아 최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비롯해 고변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는 동안에 지은 시와 문장등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또 885년에 신라로 돌아와서 지은 50편의 시와 문장 320편이 여기에 수록이 되어있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집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동아시아 최대의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최치원의 글들이 모아진 문집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가치가 있는 명품이다. 또 여기에는 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상황들에 대한 내용들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9세기 동아시아 문학의 금자탑을 이루는 작품이라 할수가 있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던 중에 지은 토황소격문(원제목- 격황소서)으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문필대공으로 큰 명성을 날리게 되는데 그때 선생의 나이 25세였다. 선생의 문장력은 동아시아의 가장 가쪽에 있는 일본에도 어김없이 알려졌고 한국과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한문학을 이끌었다.
선생의 글은 송나라때에 저술된 신당서와 , 일본 헤이안 시대에 저술된 <천재가구>에도 많이 실려있어서 선생이 신라를 넘어 동아시아의 대문장가라는 점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송나라의 <신당서>, 일본 헤이안조시대의 <천재가구>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의 글을 모아놓은 책에서도
최치원의 글이 상당수 발견되어 당시
동아시아에서의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