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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대

온달과 평강공주

by 산골지기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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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에는 온달과 평강공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에서 신라를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 장수 온달(溫達)이 군사에게 죽었다. 처음에 온달이 용모가 파리하고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미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시정(市井) 사이에 왕래하니, 그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평원왕(平原王)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울기를 좋아하므로 왕이 항상 희롱하여 말하기를, “너는 늘 울기만 하여 나의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도 반드시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될 수 없을 것이니,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고 하였다. 딸의 나이 16세가 되자 

 

장차 상부(上部)의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니, 딸이 말하기를, “왕이란 희롱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려 하십니까?

필부(匹夫)도 오히려 식언(食言)을 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지존(至尊)이겠습니까? 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왕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딸이라 할 수 없으니, 의당 네 갈 데로 가라.” 하였다.

이에 (공주가) 값비싼 팔찌[報釧] 수 십개를 팔꿈치에 매단 뒤에 궁궐을 나와 물어가며 온달의 집에 이르르니, 그 어미는 맹인(盲人)에 또 늙은이었다.

온달이 있는 곳을 물으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 솜과 같으니 필시 귀인(貴人)이요. 내 자식은 가난하고 누추하여 가까이할 바가 못되오. 내 자식은 굶주림이 극심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갔오.” 하였다.

공주가 걸어서 산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와 더불어 말하니, 온달이 왈칵 성을 내며 말하기를, “이곳은 어린 여자가 이를 곳이 못되니, 반드시 여우가 호리는 것이다.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 하고, 드디어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가 따라와 문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으나 온달이 머뭇거리며 결정을 짓지 못하자, 그 어미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配匹)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되오.” 하니, 공주가 말하기를, “진실로 마음을 같이 한다면 어찌 부귀만을 구하겠습니까?” 하고, 이에 금팔찌를 팔아 전택(田宅)·노비(奴婢)·우마(牛馬)·기물(器物)을 사니 용품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단양에 있는 온달관광지의 건물

말을 사려고 하매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아예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모름지기 국마(國馬)로서 병들고 여위어서 버리는 것을 골라오십시오.” 하니, 온달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공주가 말 기르기를 몹시 부지런히 하여 말이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나라 풍속에 항상3월 3일이면 낙랑(樂浪)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짐승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와 5부(五部)의 병사(兵士)가 모두 따라간다.

단양에 있는 온달관광지의 건물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늘 앞서 달려갔고 짐승을 잡은 것도 또한 많으니, 왕이 불러 성명을 묻고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遼東)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산(隸山)의 들판에서 맞아 싸우는데 온달이 선봉(先鋒)이 되어 수십여 급(級)을 베니 여러 군사가 승세(勝勢)를 타고 분격(奮擊)하여 크게 이겼으며, 공을 논함에 있어 온달이 제일이 되었다.

온달의 동상

왕이 가탄(嘉歎)하여 이르기를, “내 사위로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벼슬을 내려 대형(大兄)으로 삼았으니, 총애와 영광이 우악(優渥)하고 권세가 날로 성대하였다.

이에 이르러 태자 원(元)이 왕위를 이어받자 온달이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차지하여 군현(郡縣)을 만드니, 한북의 백성은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것을 불초하다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가서 반드시 이를 회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과 평강공주

떠나기에 임하여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을 우리에게로 귀속시키지 못할 바에야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행군하여 신라의 군사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사지내려고 하나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의 처(妻)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결판났으니, 아!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관이 들려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이를 듣고 비통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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