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일변도의 사상적 흐름에 밀려 표면화하지 않았던 양명학적 학풍이 정제두를 중심으로 서서히 등장하였다. 왕수인의 여러 주장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이룩한 정제두는 자신의 학문적 근거지를 강화도로 옮겨 ‘강화 학파(江華學派)’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강화 학파’라고 불리는 정제두의 계승자들은 양명학을 받아들이면서 도교와 불교까지 수용하는 개방적인 학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자기 내면에 충실하라고 주장하면서, 참된 자아의 각성과 생활 속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조선 사회는 서양 열강의 침투와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사회의 기반이 흔들리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상실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위정척사와 이를 이은 의병 활동이었다. 이항로를 비롯하여 위정척사를 주장한 학자들은 유학적 윤리 의식의 붕괴를 깊이 우려하였다. 이들은 대내외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군주와 집권 관료층의 수양과 솔선수범을 강조하였으며, 서양의 종교와 문물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척양(斥洋) · 척왜(斥倭)의 강력한 의리론을 주장하였다.
비록 보수적 · 배타적 성격이 있었지만, 이들은 통상 압력을 통해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던 서양 열강의 정치적 · 경제적 침략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양과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반외세 민족주의의 성격을 갖추었으며, 이후 반외세 의병 활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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