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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삼강행실도

by 산골지기 2018.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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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조선 세종 16년(1434) 직제학 설순(偰循) 등이 세종의 명에 따라서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부자·부부의 삼강에 거울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그림과 함께 만든 책으로 3권 3책의 목판 인쇄본이다. 세종 10년(1428) 무렵,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의 아버지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으로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지배층, 특히 세종이 받은 충격은 컸다. 윤리 도덕을 어긴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일어났지만 세종은 엄벌이 능사가 아니고 아름다운 효풍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항상 늘 가까이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아들의 아버지 살해사건이 󰡔삼강행실도󰡕를 만들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권부(權溥)의 󰡔효행록󰡕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덧붙여 백성들의 교화용으로 삼고자 하였다. 규장각 도서의 세종조 간본에는 세종 14년(1432) 맹사성 등이 쓴 전문과 권채가 쓴 서문이 있으며, 그 뒤 성종·선조·영조시대의 중간본이 전해오고 있다.

 

 성종 21년(1490)에는 이를 언해하여

그림 상단에 새겨 넣은 언해본을 편찬함으로써

 세종 때 것을 “한문본 󰡔삼강행실도󰡕”라고 하고,

성종 때 언해한 것을 “언해본 󰡔삼강행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때 중간본은 강원감영에서 간행되었다. 강원감사 이형좌(李衡佐)의 서문과 간기가 보태져 있다. 내용은 삼강행실 효자도와 삼강행실 충신도 및 삼강행실 열녀도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다.

 

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싣고 있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들고 있다. 이 책이 간행된 뒤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이 이 책의 체재와 취지를 본으로 하여 내용만 가감해서 간행되었다.

 

권채는 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책에 실려 있는 것은 모두 참고하였으며, 그 속에서 효자·충신·열녀로서 특기한 사람 각 110명씩을 뽑아 그림을 앞에 놓고 행적을 뒤에 적되, 찬시를 한 수씩 붙여 선도후문(先圖後文)의 형식을 취하였다.

여기 찬시는 효자의 경우, 명나라 태종이 보내준 효순사실 가운데 이제현(李齊賢)이 쓴 찬을 옮겨 실었으며, 거기에 없는 충신·열녀편의 찬시들은 모두 편찬자들이 지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강행실도󰡕의 밑그림에는 안견의 주도 아래

 최경·안귀생 등 당시의 알려진 화원들이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동국신속삼강행실 찬집청의궤󰡕에 안견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갈래의 작업에는 작업량으로 볼 때 여러 화원이 참여하고 실제 그림에서도 몇 사람이 나누어 그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구도는 산·언덕·집·울타리·구름 등을 갈지자형으로 가늠하고, 그 가운데 마련된 공간에 이야기의 내용을 아래에서 위로 1~3장면을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실린 사람들의 눈, 귀, 코, 입을 뚜렷하게 나타내었다. 더욱이 옷 주름을 자세히 나타내었는데, 특히 충신편에서 말을 탄 장수들의 격투장면이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산수 그림은 효자편의 문충의 문안〔文忠定省〕, 이업이 목숨을 바치다〔李業授命〕 등에는 당시 유행한 안견풍의 산수 표현이 보인다.

 

열녀편의 강후가 비녀를 빼다〔姜后脫簪〕·문덕의 사랑이 아래에 미치다〔文德遠下〕 등에서 그 배경으로 삼은 집들의 그림은 문청(文淸)의 누각산수도나 기록상의 등왕각도 등과 더불어 당시에 흔히 그리던 계화(界畫)의 화법을 원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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