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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묘청

by 산골지기 2017.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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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은 현재의 평양인 서경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과 속성, 출가한 사찰 등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평양 출신으로 어려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불교 교리 외에도 도교의 비의에도 능통했는데, 1126년(인종 4)에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에 파견되자 묘청을 스승이라 하고, 두 사람은 음양비술을 사용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또한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묘청은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 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 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소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당시 여진이 세운 금나라는 거란족이 세웠던 강대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격파해 대륙의 남쪽으로 몰아냈을 정도로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다.

금은 이때 송의 황제를 포로로 잡기도 했다. 금은 중국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금을 정벌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이 침략할 경우 나라를 보존하기도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여진족인 금의 병력은 기마부대가 주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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