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은 송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고려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을 적대시하였기에, 거란의 입장에서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다.
거란은 993년(성종 12) 소손녕에게 고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서희는 거란의 침략 의도가 고려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어 송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이를 통해 거란의 배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것임을 간파하고 이들과 외교 교섭에 나섰다.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거란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강동 6주를 얻을 수 있었다.
거란의 제2차 침입때에 개경 함락
거란의 제2차 침입은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고려에 넘긴 강동 6주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고려에서는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시켰는데, 거란은 이를 구실로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거란의 군대는 흥화진에서 순검사 양규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통주에서 고려 주력 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후방에 고려 성들이 아직 온존해 있어서 병참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고려 측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고, 그 조건으로 현종의 직접적인 조회를 요구하였다
제3차 침입은 거란이 요구하던 현종의 직접 조회와 강동 6주의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발생하였다.
강감찬--- 귀주에서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
1018년(현종 9) 소배압은 1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 고려는 강감찬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이들을 방어하였다. 거란군은 수도 개경에 근접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때 강감찬은 귀주에서 이들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양국은 사신을 보내 화약을 맺고 평화 관계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