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을 통해서본 삼국의 문화
삼국시대의 무덤 형태를 보면 돌무지 무덤과 굴식 돌방무덤 그리고 벽돌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을 들수가 있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전기의 무덤과 백제 초기의 무덤에서 많이 발견이 되는데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을 들수가 있다.
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1개 혹은 그 이상의 널발을 만들어서 시신을 안치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벽돌무덤은 중국의 남조에서 많이 유행하던 무덤인데 백제에 전해져서 무령왕릉을 축조하는데 사용이 되었다. 무령왕의 벽돌무덤에서는 귀걸이와 팔찌등 3000여점의 껴묻거리가 출토가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에서 주로 발달한
무덤의 형태인데 신라의 대표적인 돌무지 덧널무덤은
천마총을 들수가 있으며 여기에서는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이 되었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렵다는 점이 특징적이라고 할수가 있다.
강을 끼고 문명이 발달하다.
낙동강 지역의 고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먼저 낙동강의 하류지역에서는 금관가야가 발달을 하였다.
이후 4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야 연맹은 신라와 백제이 중간지대에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금관가야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략을 받고 약화가 된 다음에는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대가야가 가야 연맹의 맹주로서 활약을 하게 된다.
대가야를 중심으로하는 후기 가야연맹은 중국의 남조에 사신을 보내면서 외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대가야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지산동 고분군을 들수가 있다.
이후 6세기에 신라가 발전을 하면서 법흥왕에 의해서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이후 진흥왕떄에 대가야가 멸망을 하면서 가야연맹은 소멸이 되게 되었다.
신라가 신분사회를 형성하다.
신라는 골품에 따라서 관등에 차등을 주게 되었다.
신라의 관등조직은 법흥왕때에 정비가 되게 되었는데 관등은 17등급으로 구분이 되었다.
1등급은 이벌찬이며 2등급은 이찬이고 3등급은 잡찬이었다.
관리의 복색을 보면 1등급부터 5등급까지는 자색을 입었으며 6등급부터 9등급까지는 비색을 입었고 10등급과 11등급은 청색의 관복을 입었다.
12등급에서 17등급까지는 황색의 관복을 입으면서 등급에 따라서 관리의 복색에 차등을 주게 되었다.
삼국사기 에는 설계두가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출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백제가 한강을 상실하고 수도를 옮기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건국이 되었다.
주몽의 후예인 온조와 비류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강 유역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 온조 세력이 비류 세력을 통합하면서 한강 유역에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근초고왕때에는
한강 유역과 한강 주변지역을
완전히 점령을 하면서 백제의 전성기를 맞이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발전을 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받았고 결국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강 유역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백제는 수도를 남쪽의 웅진성으로 옮기면서 어려운 시기를 맞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국력을 회복하여 이후에는 수도를 평야지대인 사비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강 유역을 뺴앗기고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를 백제의 시련기라고 할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