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산성
청나라가 조선에 침략하였을때 조선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였다.
당시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산성내에는 주화파와 척화파로 구분이 되었는데 주화파의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이었고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상헌이었다.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홍익환과 윤집, 오달제의 3학사 이다.
남한 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우리민족의 꿋꿋한 저항의식을 잘 보여주었던
곳이라고 할수가 있다.
두만강의 유역의 무역
두만강은 우리나라의 가장 변두리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무역이 매우 발달하였는데 이유는 바로 북방민족과의 교차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에 펼쳐졌던 이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지역은 두만강 상류의 회령개시와 두만강 하류 부근의 경원개시였다.
이 지역에서 말과 모피를 수입하였고 소금과 농기구, 소등을 수출하였다.
압록강 하류와 함께 이지역은 대표적인 국경무역 지역이었다고 할수가 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인 수령
수령은 행정실무를 위해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말한다.
주로 과거시험의 합격자들이 파견이 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관찰사의 통제를 받으며서 각 지역을 다스렸다.
고려시대에는 주요한 지점에만 수령이 파견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군현에 수령이 파견이 되었다.
●조선의 수령은 종2품인
부윤이 가장 높았고 가장 낮은
등급은 종6품인 현감이었다.
수령은 일정한 임기가 있었는데 조선 성종때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수령의 임기는 1800일로 규정이 되어있다.
경국대전에는 수령이 지켜야할 수령 7사를 규정하고 있다.
조선의 궁궐
조선의 궁궐로는 대표적인 것으로 경복궁이 있다.
경복궁이란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전기에 조선의 정치가 경복궁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때에 경복궁은 불타고 말았으며 이후에는 창덕궁을 사용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원래 태종때에 경복궁의 별궁으로 지은 궁궐인데 임진왜란때에 불탔지만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때 다시 지어 조선 후기에는 주로 창덕궁에서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렸으며 주로 왕실이 가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이후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궁궐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일제시대의 대학 설립운동
◆일제시대에는 민립 대학을
설립하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월남 이상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가 되었다.
이상재는 민립대학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설립을 준비하였는데 대학을 설립하기 위하여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인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는데 일제는 한반도에 하나의 대학이면 족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경성제국대학 설립을 추진한 끝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경성제국대학은 한민족에게 다양한 차별대우를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