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항복시킨 쿠빌라이 칸은 바닷길마저 장악하고자 일본과 베트남, 자와에까지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특히, 일본에는 조공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자 3만여 명의 몽골 고려 연합군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과 태풍으로 일본 정복은 실패하였다.
남송을 정복한 직후에도 남송의 군대를 포함한 14만 명의 연합군이 다시 일본을 공격하였지만, 태풍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몽골군의 세 차례에 걸친 대월 침략도 쩐흥다오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전쟁 후 쩐왕조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자 몽골 제국에 조공 사신을 보내고 포로를 송환하였다. 쯔놈문자는 베트남어를 적기 위해 한자에 바탕을 두고 만든 문자이다.
14세기 이전에 베트남에서 사용되던 문자는 한자로, 한문 소양을 갖춘 상류층은 한문만을 사용하였다.
14세기에 베트남어를 글로 나타낼 필요성이 생기자, 한자를 베트남어 음운에 맞게 고쳐 만든 쯔놈을 이용해서 19세기까지 베트남어를 나타내는 데 사용하였다
몽골과 금의 침입에 대한
항전 과정에서 각국에서는 민족의식이 발달하였다.
고려에서는“삼국유사”,“ 제왕운기”가 편찬 되는등 단군을 시조로하는 역사의식이 나타났다.
대월에서도 쯔놈 문학이 유행하고, “대월사기”가 편찬되는 등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졌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나라가 신이 지키는 나라라는 신국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그는 베트남 역사의 시작을 남비엣에서부터 서술하였다.
남비엣의 초대 군주인 찌에우다가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중원의 한과 대등한 태도를 지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대월사기”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레 왕조 때 편찬된“대월사기전서”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