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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 들어오면서 귀족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하고, 마침내 무신 정변이 일어나며 고려 전기의 문벌 귀족 사회는 붕괴하였다.
무신 정권은 몽고의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전 국토가 유린되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이에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이 권문 세족에 대항하면서 개혁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의례가 쇠잔하고, 특히 천도 후에 악공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의례 음악, 즉 아악과 교방악 등이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도‘방등산·정읍’과 같은 삼국 시대의 음악이 전래되었고, 의종 때의 정과정이 변형되긴 하였지만 후기에도 불렸기 때문에, 후기의 향악을 전기의 향악과 구분하기는 어렵다.
또“고려사”‘악지’속악 항에 고려 속악 29곡 중, 고려 후기의 속악으로 분명히 판단되는 것은‘장생포·총석정·동백목·한림별곡·삼장·사룡·자하동’의 7곡뿐이며, 그중에서‘한림별곡’ 이하 4곡만이“대악후보”에 남아 있을 뿐이다.
또“고려사”‘악지’에 실려 있는 속악 혹은 통설적으로 고려 가요로 알려졌으며“대악후보”에도 실려 있는‘만전춘·이상곡’과, “시용향악보”에 실려 있는‘사모곡·서경별곡·정석가·청산별곡·유구곡(비두로기)·귀호곡(가시리)’등이 후기의 향악에 속한다.
고려 시대 전기의 향악 후렴구는‘아으’라는 차사 사뇌 계통이었던 데 비해, 후기의 향악들은 후렴구가‘위두어렁셩’또는‘얄라리얄라’등의 의미 없는 말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