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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국채보상운동

by 산골지기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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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대한제국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지속하였습니다.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군사기지 사용권 허가를 골자로 한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였던

일본은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일본인 재정고문과

일본 정부가 추천한 외무고문을 고용하게 하였습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

고리의 차관을 들여왔는 데요  1차 한일협약 이후로 차관은 더욱 확대가 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


대한제국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의 차관이 대량으로 유입하면서 조선의 경제 예속화를 가속하게 됩니다.

메가타 다네타로
대한제국 재정고문
일본의 차관을 대량으로 유입

일본의 무차별한 차관 공여는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적 독립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었는데요 일본의 차관을 전국민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민간 차원에서 국채를 상환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에게 진 빚을 갚자는 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대구 광문사 사장이었던 김광제와 서상돈 등에 의하였습니다.

서상돈의 고택은 현재 대구의 지방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국채보상 취지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대구광문사 회원들이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의연금 모금활동에 나서는 과정에서 발표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한 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국채보상 취지서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은 당시에 발간되었던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제국신문, 만세보, 황성신문등의 보호를 받으면서 전개가 되게 됩니다.

서상돈과 김광제를 중심으로 하여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이후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여성과 백정들까지 참가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의 모금소는 서점과 약국, 대한매일신보사, 잡지사 등이 맡았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는 관료와 상인, 유림과 각종 단체 외에도 여성과 백정들까지 참가를 하였습니다.

여성들은 비녀를 팔아서 모금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이 되는 가운데 1908년까지 지속되었고요 자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이었습니다.

1907년 여름에는 폭발적으로 의연금이 모이면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자발적인 모금 운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자발적인 민간 모금 운동으로 시작된 운동입니다.

자발적인 민간 모금 운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었지만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을 통합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사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초반부터 대한매일신보사의 양기탁과 베델에 대한 일제 통감부 측의 집요한 방해공작이 지속되었습니다.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하고 있던 보상금을 베델과 양기탁이 사적으로 소비하였다는 거짓 혐의를 씌웠고요  양기탁을 공금횡렴혐의로 구속하고 베델에게는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했습니다,

 양기탁은 조사 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양기탁이 일시적으로 구속이 되면서 운동의 동력은 급격하게 약해졌고요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는 대구 광무사장 김광제, 서상돈등이 지었는데요 대구 광무사장 김광제, 서상돈등이 지은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는

대한매일신보에 게제가 되어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 게제된 국채 1300만 원 보상 취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가 아뢴다. 무릇 신민(臣民)이 된 자가 충성과 의리를 숭상하면 나라가 흥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

반면 불충하고 불의하면 나라는 무너지고 백성은 멸망한다.

비단 고금의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현재 서구 중에서 부강한 나라들과 멸망에 이르게 된 나라들을 보아도 모두 충성과 의리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경우가 없으며, 이는 과거의 옛 나라들이나 먼 서구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 동양의 가까운 경우를 살펴볼 때,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일본이다.

예전에 청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이겼다. 이는 군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유혈이 가득한 전쟁터에 기쁘게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백성들은 신발을 만들어 팔거나 소지품을 팔고, 아녀자들은 반지를 모아서 군자금에 보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마침내 동서양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전공을 세웠고 그 빛나는 무훈이 세상을 진동시켰으니, 이는 5,000만 민족 각 사람의 뜨거운 피에 기인한 것이며 진실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흠모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 우리 2,000만 동포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움에 처한 때를 만나 어느 한 사람 결심하지도 않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단지 우리 황상(皇上)이 지극히 근심하시는 것만 바라보면서 수수방관한 채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면, 이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근래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면, 나라가 무너져서 멸망한 이집트·베트남·폴란드 등의 민족이 모두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자기 몸과 자기 집만 알았을 뿐 군주와 국가를 생각하지 않아 결국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충성과 의리를 분발할 때가 아닌가?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로는 보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땅을 한 번 잃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과 같은 나라의 민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도 이 국채 보상에 대한 의무에 대해 모른체 하거나,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보상에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2,000만의 백성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 사람마다 20전씩 낸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다.

만약 부족하다면 1, 10, 100, 1000원 등 따로 기부를 받으면 될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니만큼 잠시 결심만 하면 된다. 일본의 결사대들이나 반지와 살림을 내놓은 일본 국민들과 비교하면 무엇이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 우리 2,000만 동포 중 진실로 조금이라도 애국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족한 우리들이 이렇게 발기하여 경계하는 글을 계속 내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 대한의 군자들이 모두 보고 말과 글로 서로 경고하여 모든 사람이 이 내용을 알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이를 통해 위로는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지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국채보상운동 취지서에서는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라고 하였고요 나라빚을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서상돈과 김광제등은 2,000만의 백성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 사람마다 20전씩 낸다면 1,300만원을 모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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