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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근대 신문

by 산골지기 2022.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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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 한성주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은 19세기 말부터 발행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은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였습니다.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 이후

독립신문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들이 차례로 발행이 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은 19세기 말에 발행된 근대 신문과

1900년대 초에 발행된 근대 신문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https://youtu.be/opXwb5ERpRo

근대신문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요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이 체결하자 이에 분노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을 논설을 실었습니다. 

황성신문에 실렸던 시일야방성대이라는 논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2022.02.06 - [우리 역사/근현대사] - 근대 신문

 

근대 신문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은 19세기 말부터 발행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은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였습니다. 박문국에서 발행한 한성순보 이후

namjindu.tistory.com

시일야방성대곡을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When it was recently made known that Marquis Ito would come to Korea our deluded people all said, with one voice, that he is the man who will be responsible for the maintenance of friendship between the three countries of the Far East (Japan, China, and Korea), and, believing that his visit to Korea was for the sole purpose of devising good plans for strictly maintaining the promised integrity and independence of Korea, our people, from the sea-coast to the capital, united in extending to him a hearty welcome. But oh! How difficult is it to anticipate affairs in this world. Without warning a proposal containing five clauses was laid before the Emperor, and we then saw how mistaken we were about the object of Marquis Ito's visit. However, the Emperor firmly refused to have anything to do with these proposals and Marquis Ito should then, properly, have abandoned his attempt and returned to his own country. But the Ministers of our Government, who are worse than pigs or dogs, coveting honours and advantages for themselves, and, frightened by empty threats, were trembling in every limb, and were willing to become traitors to their country and betray to Japan the integrity of a nation which has stood for 4,000 years, the foundation and honour of a dynasty 500 years old, and the rights and freedom of twenty million people. We do not wish to too deeply blame Pak Che Sun and the other Ministers, of whom, as they are little better than brute animals, too much was not to be expected, but what can be said of the Vice-Prime Minister, the chief of the Cabinet, whose early opposition to the proposals of Marquis Ito was an empty form devised to enhance his reputation with the people? Can he not now repudiate the agreement or can he not rid the world of his presence? How can he again stand before the Emperor and with what face can he ever look upon any one of his twenty million compatriots? Is it worth while for any of us to live any longer? Our people have become the slaves of others, and the spirit of a nation which has stood for 4,000 years, since the days of Tun Kun and Ke-ja has perished in a single night. Alas! fellow-countrymen. A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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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란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이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과정 전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약 1주일 뒤인 1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도 거의 그대로 전재되었다. 이 무렵 『황성신문』은 이미 정간된 상태였으므로 미처 못 읽은 사람을 위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시 보도한 것이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을사늑약에 대해 기록할 때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장지연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 받을 때 논설은 자신이 썼지만 보도기사는 성낙영의 취재에 의한 것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성낙영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1889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5년 12월 사관양성소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5월 양성소를 그만둔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는 1898년 9월 황성신문사에 사무원으로 입사하여 9년 동안 근무하였다. 성낙영이 취재만 하고 기사는 장지연이 쓴 것인지 아니면 그가 기사까지 직접 작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황성신문』은 이 논설과 함께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이란 제목의 기사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당시 국민들은 이로써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과정 전체를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이 기사는 약 1주일 뒤인 11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도 거의 그대로 전재되었다. 이 무렵 『황성신문』은 이미 정간된 상태였으므로 미처 못 읽은 사람을 위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시 보도한 것이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을사늑약에 대해 기록할 때 이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장지연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조사 받을 때 논설은 자신이 썼지만 보도기사는 성낙영의 취재에 의한 것이었다고 진술하였다. 성낙영은 충청도 괴산 출신으로 1889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95년 12월 사관양성소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5월 양성소를 그만둔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는 1898년 9월 황성신문사에 사무원으로 입사하여 9년 동안 근무하였다. 성낙영이 취재만 하고 기사는 장지연이 쓴 것인지 아니면 그가 기사까지 직접 작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 말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

19세기 말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으로는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제국신문이 있습니다.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한성순보 1883년부터 1884년에 걸쳐 2년간 발행
한성주보 한성순보가 페간 된 후에는 한 주일에 한 번씩 발간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는 1883년부터 1884년에 걸쳐 2년간 발행이 되었습니다.

한성순보가 페간 된 후에는 한 주일에 한 번씩 발간이 되는 한성주보가 1886년에 발행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은 독립신문인데요 독립신문은 1896년에 독립협회에서 발행을 하였습니다.

독립신문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협회에서 발행

황성신문은 1898년에 남궁억이 발행을 하였습니다.

남궁억이 발행한 황성신문은 후에는

발행인이 장지연으로 바뀌게 됩니다.

제국신문은 순 한글로된 신문인데요

1898년에 발행이 되었으며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많이 애독이 되었습니다.

1898년에 발행된 신문
황성신문 1898년에 남궁억이 발행
제국신문 순 한글로된 신문
부녀자들 사이에서 많이 애독

1900년대 초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

대한매일신보
1904년에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발행
한일합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로 바뀜

1900년대 초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와 만세보, 경향신문이 있습니다.

 

1900년대 초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인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이 발행을 하였습니다.

베델과 양기탁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강했던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후 총독부의 기관지로 바뀌게 됩니다.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양기탁

1900년대 초에 발행된 우리나라의 근대 신문인

만세보와 경향신문은 종교단체의 기관지 였는데요

만세보는 천도교의 기관지 였고 경향신문은 천주교의 기관지 였습니다.

천도교의 기관지인 만세보는 1906년에 오세창과 손병희가 간행을 하였습니다.

천주교의 기관지였던 경향신문은 1906년에 프랑스 신부 안세화가 발행을 하였습니다.

종교단체의 기관지
만세보 천도교의 기관지
경향신문 천주교의 기관지

 

●김성수가 발간한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20년에 김성수가 발간을 하였습니다.

아일보는 3.1운동이후 일제가 취한 문화정책에 영향을 받아 발간이 되게 됩니다.

동아일보는 1920년에 발간된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시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간신문으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동아일보와 함께   1920 년에 발간된 조선일보

김성수가 발간한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많이 받았습니다. 창간 직후에 415일자 기사 '평양에서의 만세소요'가 압수처분을 받게 됩니다.

19209월에는 '제사(祭祀)문제를 재론(再論)하노라'가 문제가 되어 처음로 정간 처분을 당하게 됩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간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김성수가 발간
창간 직후에 4월 15일자 기사 '평양에서의 만세소요'가 압수처분을 받음
1920년 9월 '제사(祭祀)문제를 재론(再論)하노라'가 문제가 되어 처음로 정간 처분

 

동아일보가 받은 1차 정간은 창간 이듬해인 1921년 1월에 해제가 되게 됩니다.

인촌 김성수가 창간한 동아일보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여러 사업을 벌였습니다. 창간 이듬해인 1921년에는 김동성 기자가 국제기자대회에 참석하면서 대외적인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1922년에는 재외동포 위문모금운동을 추진하였고요 비행사 안창남이 국내에 왔을떄에는 고국방문 비행을 주최하기도 했습니다.

1923년 9월에는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동포 학살 참상을 취재 보도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후 지방판도 발행을 하면서 우리나라 신문중에서 처음으로 지방판을 발간한 신문이 되게 되빈다. 동아일보의 지방판은 중부·서북·삼남의 3개 지방판 분리 편집을 하였습니다.동아일보는 신문발행외에 여러 사업을 통해 민족운동을 꾸준히 계속하게 돕니다.

동아일보는 1931년 11월에는 자매잡지인 신동아를 창간했고여 뒤어어 1933년에는 여성지 《신가정》을 창간하게 됩니다.

동아일보의 자매잡지
1931년 11월에 자매잡지인 신동아를 창간
1933년에 여성지 《신가정》을 창간

동아일보 창간호의 모습

동아일보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을 때에

일장기 말소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1936년에 있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민족언론의 저항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 이었습니다.

동아일보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원인이 되어 무기정간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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