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 논란이 있다.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하여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자(字)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나 56년 만인 2018년에 박탈되었다.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