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한일 합방에 대하여 기술 하면서 '한국의 병합은 일본과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위해서 이루어졌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한일합방에 대해서 기술한 일본 지유샤 교과서의 내용
< 일러전쟁 후 일본은 한일협약에 의해 한국에 한국 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해 갔다. 구미 열강은 영국의 인도, 미국의 필리핀, 러시아의 외몽고 등 자국의 식민지와 세력권의 지배를 일본이 인정하는 댓가로 일본이 한국을 영향 하에 두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가 외몽고의 영유권을 차지한 댓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는 사실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다면 러-일 전쟁이 일어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를 둘러싼 마지막 혈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획득하고 남진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한반도가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의 이권침탈에 나서게 되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체결된 것이 을사조약이다. 을사조약에 따라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조선의 직접 통치하기 위하여 통감부를 설치 하였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작업을 차곡차곡 진행시켜 나가게 되는데 고종이 을사조약을 무효로 하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자, 이 밀사파견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또 조선의 군대마저 해산을 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군대해산은 의병들의 항쟁을 유발하게된다.1907년 8월부터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전개가 본격화되게 되는데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에는 의병전쟁이 절정에 이르게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남한대토벌 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1909년 11월까지 있은 70여일간의 토벌기간중에 체포되거나 학살된 의병장의 수가 103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강압적인 과정을 거쳐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게된것이다.이러한 강압적인 한일합방에 대해서 지유샤 교과서에서는 <한국의 병합은 반대를 누르고 단행됐다>라고 기술을 하고 있다.
무자비한 탄압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한일합방의 과정이 <반대를 누르고 단행됐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일본의 의도는 과히 통탄해야할 상황이다.
일본의 조선 병합은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바람직하다고 할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