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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고종장례일에 일어난 3-1 민족운동

by 산골지기 201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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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장례일에 일어난 대표적인 민족운동으로 3.1운동을 들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을 한후 일본은 무단통치로 조선을 통치하였는데 3.1운동을 계기로 통치의 스타일을 문화통치로 바꾸게 된다.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제의 가혹한 무단 통치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제는 헌병경찰을 앞세워 조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이러한 통치에 대한 불만이 3.1운동을 통해 폭발을한 것이다.

이외에 3.1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이다.

3.1운동이 일어나지 조금전에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을 하였다.

3.1운동은 가장 먼저 서울에서 독립 선언을 하였는데 종교계의 대표와 학생층이 주도가 되어 독립선언을 하면서 기본 원칙은 비폭력주의를 표방하였다.

 

3.1운동은 이후 전국의 도시로 확산이 되었는데 충청도에 이어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까지 확대가 되었다. 전국 도시에서 일어난 3.1운동은 교사와 학생, 상인, 노동자 층이 주도가 되었는데 상인들이 철시를 하고 노동자들도 시위를 하였다.

 

대표적인 지역은 충청도 천안인데 유관순이 천안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단계에서는 농민층이 주도하였는데 일제의 탄압에 맞서 무력으로 저항을 하였으며 마지막 안감힘을 내면서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였다.

 

 

 

3.1운동 당시에 국내의 애국지사들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 불교와 천도교, 개신교가 참가하였다.

3.1운동 당시에 소실된 교회의 수는 47개이고 학교도 2개가 소실되었다.

민족 지도자들은 시위가 과격해질것을 경계하기도 했는데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였고 학생들은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만세 선언을 하고 시내로 나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은식이 독립운동 지혈사에 의하면 사망자가 7509명이고 부상자가 15961명이다. 가옥은 715채가 소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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