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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경인선

by 산골지기 2016.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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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늦게나마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깨달았지만, 당시 재정이 빈궁하여 독자적으로 철도를 부설할만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수도 서울은 수백년간 한강을 통한 수운으로 물자를 수송하였으나, 개화와 산업발전을 위하여는 서울을 항구과 직접 연결해주는 새로운 대량수송 수단이 필요하였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되면서 서울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철도가 구상되었다.

한편 경인선 철도 부설에 관심이 있던 미국 정부는 1883년 6월 23일 독변교섭통상사무 민영목을 통해서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을 허가받고, 1887년 2월 9일에는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E. Frazar)를 통해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이후 1891년 3월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을 시켜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협상하였고, 모스는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1894년 8월 무단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고, 이는 조선 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으므로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직후의 삼국간섭으로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1896년 아관파천 50일 만인 3월 29일 철도부설권은 모스에게 넘어갔다. 이는 철도에 대한 최초의 특허권 부여이자, 미국이 조선정부로부터 최초로 이권을 양도받은 사건이기도 하다.

경인선 개통식


인천역 앞에 있는 ‘경인철도 시발지’ 빗돌한국정부가 모스와 체결한 '경인철도특허조관'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에 기공, 그 후 3년 안에 준공하며, 이를 위반할 시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경인가도상의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기공식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되었고, 1898년 5월 10일 공사 중인 경인철도가 170만 2452원 75전 (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4]

1899년 9월 18일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다.[5]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6]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

1900년 7월 8일에는 노선이 노량진역에서 경성역까지 연장되었으며[8], 같은 해 11월 12일 경성역에서 경인철도 완전개통식이 진행되었다.[9] 1906년 2월 10일에는 우각동역이 폐지되었으며[10], 1908년 12월에 선로의 개량으로 당시 축현역이 이설되었다.


 

노량진역에서 한강철교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철도 시발지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99년에 제작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 중 노량진역 스탬프에 새겨져 있다.

도원역 부근에도 경인선 기공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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