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의 설립은 1907년 4월 안창호의 발기로 추진되었다.
창립을 위한 창건위원에는 양기탁·전덕기·이동휘등 7인이었고 이후 이승훈과 노백린, 이시영, 이회영, 이상재, 윤치호등이 참여를 했다.
신민회의 홍보와 계몽활동은 대한매일신보가 맡았고 실질적인 활동공간을 제공한 곳은 상동교회였다. 신민회의 실질적인 창설 활동도 상공교회의 지하실에서 이루어졌다. 상동교회는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톤이 설립하였는데 전덕기 목사가 부임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되었다.
서북 지방과 서울 등지의 신흥 시민 세력이 주축이된 가운데 미주에서 활동하던 공립협회의 인물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독립협회의 청년회원들이었기 때문에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국에 거주하던 안창호와 임준기, 이강 등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에서 안창호가 생각해 낸 대한신민회를 조직하기로 합의하고 <대한신민회 취지서>를 작성했다.
미주에서 이 단체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에서 이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합의하였고 국내에 안창호를 대표로 보내기로했다.
1907년 2월에 서울에 도착한 안창호는
본격적인 신민회 설립작업에 착수를 하게된다.
안창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에게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처음에 양쪽의 입장차이로 설립이 지연되기도 했는데 공개단체를 주장하던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면서 창립이 이루어지게 된다.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신민회의 설립직후 총감독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이 맡았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설립에 참여하였던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신민회는 민족 운동과 교육 운동의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설립하고, 자기 제조 주식 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