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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나운영

by 산골지기 2016.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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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작곡

---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으며,

 1955바이올린을 위한 산조에서 한국적 표현을 구체화

 

나운영은 1939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작곡부문에 응모했고 1등으로 당선 되었다.

 

작곡부문의 심사위원장은 홍난파.

신춘문예에 작곡부문이 들어간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

 

 

이후 <가려나>는 김억이 1925년에 펴낸 창작시집 <봄의 노래>에 실렸다.


[가려나]는 사랑하는 이가 떠나려는 것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젊은 날의 기쁨과 설움, 앞날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1974년--- 미국 포틀랜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획득

 

나운영은 국악을 각별히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누구나 나라 없는 슬픔과 울분을 안고 살던 때였다.

나운영은 “나라는 없어도 개인이 우수하면 민족의 이름을 빛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음악을 통해서, 작곡을 통해서, 손기정 선수처럼 민족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가곡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다.

 

김수향의 시에 곡을 붙인 이 가곡은

지금도 가을이면 자주 불려지는 노래이다.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부터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

 


 

 

 이 노래도 김수향(본명은 윤복진, 1908~1991)이 월북작가였기 때문에 가사를 바꿔 불러야 하는 수난을 겪었다.

 

나운영은 1939년   12월 동아일보 신춘현상문예

작곡부문에 <가려나>에 곡을 붙여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제주(濟州)의 한국민속음악 박물관을 설립했고  말년에는 성가작곡에 전념했다.

 

그가 만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비롯 `주께 드리네' 등 다수곡이 카톨릭성가집에 실려있을 정도다.

성가를 통해 신-구교일치운동을 펴기도 했던 그는 원래 카톨릭신자였는데  신부가 되기위해 원산(元山) 덕원신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했었고 성악가인 부인 柳慶孫여사와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렷다. 이후 46년 개신교로 개종했다.

개종후 서울역앞 성남교회서

30년이상 교회성가대를 지휘했으며

 79년이후 송파구 오금동 호산나교회에서

 매달 `월례신작성가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그는 52년부터 강단에 서기 시작, 이대, 연세대, 전남대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현대음악협회장, 한국민속음악박물관장, 한국동요동인회장, 한국聖音樂협회장등을 역임했다.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음악형식론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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