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간섭 이후 조선 정부가 러시아에 접근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소환하고 대신 군인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그 자리에 임명한다.
미우라는 친러파의 중심 인물로 명성 황후를 지목하고 일본 수비대와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낭인들은 옥호루에서 명성 황후를
시해한 뒤 석유를 뿌려 시신마저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일본은 이를 흥선 대원군과 해산설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짓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궁내에 머물렀던 러시아 전기 기사 사바친(Sabatin, G)과 미국인 시위대 교관 다이(Dye, W. M.)에 의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은 미우라 고로 이하 사건에
가담한 48명을 일본으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이어 벌어진 재판에서 이들은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오히려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을미사변이후에 을미개혁이 단행이 되었는데 을미개혁에서 추진한 내용 중 가장 논란이 된 정책은 단발령이었다.
그리고 단발령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은 유길준이었다.
고종은 단발령에 미온적이었으나 일본과 유길준의 강한 주장에 단발령을 내리고 제일 먼저 머리를 깎을 수밖에 없었다.
유길준은 가위를 들고 세자의 머리를 직접 깎았을 뿐만 아니라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랐다.
유인석, 이소응 등 유생들은 분노하여
일본을 응징하고자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단발령이 일본의 강요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으며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 내각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행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에 거세게 저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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