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특사들은 우방으로 믿었던 러시아와 미국, 그리고 주최국인 네덜란드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입장을 담은 공고사를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그 전문을 ‘평화회의보’에 발표하였다.
또한, 영국 언론인 스테드의 주선으로 언론인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어 ‘한국을 위해 호소한다(A Plea for Korea) ’는 제목의 연설로 주목을 끌었고 이 내용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외교적으로 구체적인 성과를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 강제 퇴위를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이 즉위하면서 한ㆍ일 신협약이 체결되었다. 헤이그 특사들은 통감부에 의한 궐석 재판에서 종신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만주족은 청을 세우고 중국을 정복한 후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이주하였다. 백두산 북쪽 간도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남게 되었지만, 청은 이 지역을 황실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 지역으로 선포하였다.
이후 조선인들이 넘어가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고, 청은 이를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확정을 위한 조사가 공동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백두산에 경계를 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삼는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19세기 말 토문강의 존재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대한 제국에서는 쑹화 강의 지류를 토문강으로 설정하였고,
청은 발음이 비슷한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주장하였다.
대한 제국은 관리를 파견하여 간도 지역을 관리하였지만,
을사조약(1905) 이후 외교권을 행사하게 된 일본이 만주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조건으로 두만강 이북을
청의 영토로 확정하는 간도 협약(1909)에 합의하였다.
백두산정계비는 만주 사변(1931) 이후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