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은 만주 일대에서 수렵과 농경에 종사하던 민족으로, 1115년에 아쿠타가 부족을 통합하여 금을 세웠다.
금은 연운 16주의 회복을 노리던 송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키고, 이어 송까지 멸망시켜 화북 지방을 점령하였다.
여진족은 만주 일대에서 농경과 수렵을 하던 민족으로, 발해의 지배를 받다가 10세기 초에 거란족이 동북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한 이래로는 그 지배를 받았다. 이러한 관계에 불만을 느낀 아쿠타의 아버지가 1100년에 반란을 계획하였지만, 그는 그 해에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112년, 요의 마지막 황제가 부족장 아쿠타에게 자신을 위해 춤추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부족을 통합한 후 금을 건국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1115). 송은 요가 점령하였던 중국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아쿠타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 관계에 힘입어 아쿠타는 몇 년 사이에 요의 전 영토를 정복하고 남쪽으로 송의 수도를 장악하였다.
송 멸망 이후 남송이 세워지자 금은 비단, 은 등의 막대한 물자를 받는 조건으로 남송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교역하였다.
고려와도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고려의 금, 은,인삼 등을 말, 짐승 가죽 등과 교역하였으며, (서)하로부터 조공을 받고 교역을 지속하였다.
금은 요의 이원적 통치 정책을 계승하여,
유목민은 전통적인 씨족 조직이자
군사 조직인 맹안-모극제로 다스렸고,
한족 등의 농경민은 주현제로 통치하였다.
또한, 고유의 풍습과 문화를 유지하고자 고유 문자를 만들고 불교를 숭상하였다.
여진족 사회에는 전통적으로
맹안과 모극이라는 씨족제도가 있었다.
아쿠타는 이를 군사 조직으로 바꾸어 300가구를‘모극’이라 하고 10모극을‘맹안’이라 하여 1모극에서 100명의 병사를, 1맹안에서 1,000명의 병사를 징발하였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맹안과 모극은 군사 집단이자 동시에 부족의 군사 지도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진족은 맹안과 모극이라는 사회 조직에 따라 생업에 종사하였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맹안과 모극은 그대로 군사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여진의 문자는 거란 문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제자 원리에서 한자를 본으로 삼았고, 한족의 문화에 맞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려 했던 북방 민족 왕조의 의도가 반영되었다.
대자와 소자로 나뉘며, 대자가 먼저 만들어졌다. 해독은 불명확한 점이 많으며, 전반적인 제자 원리나 규칙성 등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