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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사대부의 성장

by 산골지기 2015.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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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광종이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도입하였다. 과거 시험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주로 관료와 향리의 자제들이 응시하였다. 그러나 송 대 후기와 마찬가지로 고려에서도 음서의 비중이 컸다. 과거제는 조선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관료 선발 제도로 자리 잡았다.

 

베트남의 리 왕조에서도 과거제를 시행하였으나 그 비중은 크지 않았다. 무인이 지배하던 일본에서는 과거제가 시행되지 않았다.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학문적 능력을 기르는 방법으로 교육이 더욱 강조되고 교육 기관도 정비되었다. , 고려, 베트남 등은 중앙에 최고 교육 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하였고, 지방에도 학교를 두었다. 조선에서는 최고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을 두었다.

관학 이외에 명망이 높은 유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도 각지에 들어섰다. 이는 학문의 발전과 문인 관료 양성에 기여하였다.

과거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각국에서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가 형성되었다. 과거제의 영향으로 유교 지식과 교양을 쌓아 관료로 진출하려는 학자층이 형성되었다.

 

그중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로 진출한 이들을 사대부라고 불렀다.

 

학문에만 전념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대부 중 강남 지방의 지주 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명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자에게만 과거 응시 자격을 주었다.

 

과거 시험을 통해 얻은 자격은 종신토록 유지하게 하였고, 학위에 따라 요역 면제의 특권을 주었다. 이에 과거 응시자가 대폭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졌고, 그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못한 채 지방에 정착하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퇴직 관료 등과 함께 지방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들을 아울러 신사라고 한다.

 

신사는 명 중기 이후부터 청 말까지 실질적으로 지방 사회를 지배하였다. 사대부와 신사는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책임으로 여겼다.

고려 말에는 신진 사대부가 성장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대체로 향리 집안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성리학을 내세워 불교 사원 및 그들과 결탁된 권문세족의 횡포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신흥 무인 세력과 결합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무과가 도입되면서

무반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양반이라고 하였다. 양반은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공부에 전념하면서, 과거나 문음 등을 통해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부역을 면제받는 등 점차 세습적 특권층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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