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남한에 조직근거를 둔 것과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한 것 두 단체가 있다.
1919년 3월 중순 서울에서 3·1운동 투옥지사의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오현주·오현관·이정숙 등이 혈성단부인회를 조직, 활동했고, 같은 해 4월에는 최숙자·김옥희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활동의 확대를 위해 두 부인회를 통합했으나 그 활동이 부진하자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김마리아·황에스터 등 17명이 모여 발전적 해체를 통한 재조직에 의견을 일치시켜 새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임시정부 지원과 더불어 절대독립을 쟁취할 항일독립전쟁에 참여할 준비를 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각 지부의 부서에 결사대를 두었다.
중앙조직의 회장에는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황에스터를 임명했다.
활동한 지 1~2개월 만에 약 6,000원의 군자금을 상하이에 보냈고 회원도 100여 명 이상 늘었다.
1919년 10월 13일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임시정부 산하에서 활동했다.
회장 이화숙, 부회장 김원경, 총무 이선실이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와 운명을 같이해 그 활동이 극히 부진했으나 1940년대에 주의와 이념을 초월해 임시정부를 재지원했다.
1943년 2월 23일 정부피난지 충칭에서,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열고 주석에
김순애, 부주석에 방순희를 추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