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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독립운동

김마리아

by 산골지기 2015.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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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소래마을)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기독교 신자였던 부친이 지어준 세례명인데 이 이름을 정식으로 사용 하였다.

 

 집안이  부유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송천리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은 선생의  삼촌이었는데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기도 했다. 

 

또  김규식의 부인 이었던 김순애는 선생의  고모였다.

 

 

1896년 부친이 세운 소래[松川]학교에 들어가 

기독교의  신학문을 익혔고, 1901년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에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상경한 후에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면서 1906년부터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이 때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점증되던 국망의 위기의식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고, 또 삼촌의 집에 드나들던 안창호·김규식·이동휘(李東輝) 등 애국지사들의 초조한 발걸음을 보면서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더욱 키워 갔다.

 

 1910년 6월 16일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큰언니 김함라(金函羅)가 근무하던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1913년 은사들의 추천으로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듬해 선생의 재능과 조국에 대한 열정에 감동한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재정 지원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선생은 히로시마의 금성학원(金星學院)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익힌 뒤, 1915년부터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선진 학문을 습득하여 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1918년 1월 8일 전후 처리 지침으로써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선생과 황애덕 등 여자 유학생들은 성금을 거둬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2·8독립선언 당일에는 동경 간다(神田)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석하였다.

  황애덕과 같이 등단하여 일제의 한국 식민지 정책을

신랄하게 성토 규탄하고,  일제와 투쟁할 것을 간절히  호소하였다.

 

2·8독립선언 이후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고  석방된 이후에는  이같은 독립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고, 국내에 전파하여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대하여야 조국 광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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