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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일제 초기(1910~20)

by 산골지기 2015.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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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초기(1910~20)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대부분의 신문은 강제 폐간을 당했다(→ 일제강점기). 총독부는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매일신보 每日申報〉로 바꾸어 기관지로 삼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폐간시켰다. 일본계 신문도 보상을 하고 폐간시켜 당시 인구 1,240만의 한국인을 위한 국문지는 서울의 〈매일신보〉와 진주의 〈경남일보 慶南日報〉 2개에 그쳤으며 발행부수도 각각 3,000부 미만이었다. 그러나 인구 16만의 재한일본인을 위한 일본어 신문은 대도시마다 발행되어 모두 16개의 신문사가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언론정책하에서 한국 국민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상태였고, 한국 언론은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3·1운동 이후(1920~40)

3·1운동으로 촉발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라는 구호를 내걸고 한국 국민에 대한 회유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 하나로 한국인에게 3개의 민간지 발행을 허가했다. 1920년 1월 총독부 경무국은 민족주의 진영의 이상협 등에게 〈동아일보 東亞日報〉를, 조일동화주의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종석에게 〈조선일보 朝鮮日報〉를,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의 민원식에게 〈시사신문 時事新聞〉을 각각 허가했다. 이 가운데 〈조선일보〉가 1920년 3월 5일 창간호를 냈고, 4월 1일에는 〈동아일보〉가 〈시사신문〉과 함께 창간되었다.

이들 모두는 4면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발행했으며,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다. 김성수를 중심으로 발간이 추진된 〈동아일보〉는 창간사에서 '조선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족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는 3대주지를 밝히고 처음부터 민족 대변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 창간 5일 만에 1차 정간을 당하는 등 그해 8월 중순까지 10여 회의 발매금지를 당했다. 〈조선일보〉는 초창기에 친일파가 경영실권을 장악했으나, 1924년 신석우가 판권을 인수하면서 민족 대변지로 혁신했다.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인 이상재를 사장으로 영입하여 가을부터 민간지 최초로 석간 4면, 조간 2면의 조석간제를 채택했으며, 무선전화 시설, 부인란의 신설과 여기자의 채용 등 획기적인 기획을 실현해나갔다.

신일본주의를 표방한 〈시사신문〉은 친일 국민협회의 기관지로 총독부 정책을 적극 옹호하던 중 창간 1년을 넘지 못하고 1921년 사장인 민원식이 암살당하자 휴간했다. 1924년 3월 또하나의 민간 국문지인 〈시대일보 時代日報〉가 창간되었다. 최남선이 잡지 〈동명 東明〉을 일간지로 바꾼 것이다.

이 신문은 곧 발매부수 2만 부를 돌파하여 단시일 내에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1924년은 우리 민간신문의 새로운 기원을 이룩했다. 〈조선일보〉가 혁신되고 〈시대일보〉가 등장하여 〈동아일보〉를 포함한 민간지 3개가 전부 한국인 자체의 힘으로 한민족의 이익을 수호하는 민간지로서 민족운동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 침략을 강행하면서 민간지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 그해 10월에 새로운 일간지 〈중앙일보 中央日報〉가 창간되었으나 재정난으로 휴간되다가 1933년 제호를 〈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로 바꾸고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혁신을 꾀했다. 그러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무기정간 조치를 당한 후 폐간되었다. 일제가 전시체제를 갖추어나감에 따라 시국이 점차 어려워졌으며. 민족저항운동도 더욱 큰 탄압을 받았다. 이에 따라 민간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민중의 계몽을 통한 문화정신의 계발에 역점을 두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하자 총독부는 한국 민족에게 황민화 운동,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등을 강제했으며, 신문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1940년에 들어와 총독부는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대해 자진 폐간할 것을 강요하여 그해 8월 10일 폐간되었다. 이로써 창간된 이래 무기정간 각 4회를 비롯하여 수천 번의 판매금지·압수·삭제 처분을 당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강제폐간을 당했으나, 일제의 모진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위해 애국적 언론투쟁을 계속하면서 한국 신문을 현대적 수준까지 이끌어 올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민간지의 소멸기(1940~45)

1940년 〈동아일보〉·〈조선일보〉가 강제폐간을 당하게 되자 다시 한반도는 신문이 없는 암흑기를 맞게 되었으며, 이는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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