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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책,

우리나라의 문학

by 산골지기 2025.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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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문학

 

삼국시대의 문학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성립된 시기부터 후삼국 시대까지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학장르인 향가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시가 양식으로, 주로 귀족층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향가
신라의 대표적인 문학장르
주로 귀족층에 의해 발전

주로 귀족층에 의해 발전한 향가의 작가는 주로 승려와 화랑인 경우가 많습니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시기에는 향가집인 삼대목이 편찬되기도 했는데요 진성여왕 시기에 편찬된 향가집인 삼대목은 현재 전하지는 않습니다.

이외에 삼국시대에는 유··선의 교리 영향을 받은 문학이 성행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설화문학이 발달을 하는 가운데 건국 신화, 영웅 설화 등이 발달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문학인 구비문학과 희곡의 원형도 삼국시대에 시작되었습니다

 

고구려의 문학

고구려에서는 서사 문학이 발달하였습니다.

서사문학이 발달한 고구려와 달리 신라와 백제에서는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했습니다

삼국시대의 문학
고구려--- 서사 문학이 발달
신라----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
백제--- 서정적인 가요 문학이 발달

 

북쪽지역에 위치한 고구려에서는 서사 문학이 발달하여 많은 설화 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시가로는 유리왕이 지은 작품인 황조가가 있고요 내원성가, 연양가, 명주가 등도 존재했지만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줄거리만 남아있습니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시가
황조가
내원성가
연양가
명주가

고구려 시대에는 설화도 발달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주요 설화로는 관나부인 설화를 비롯하여 교축일 설화와 호동왕자 설화, 유리태자 설화 등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대표적인 기록물로는 광개토왕의 비문을 들수가 있는데요 광개토왕의 비문은 고구려 민족의 긍지와 업적을 표현한 민족 서사시로 볼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414년에 건립한 거대한 비석인데요 높이 6m를 넘는 판석에 1775자의 예서체 한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광개토왕릉비
414년에 건립
1775자의 예서체 한자로 기록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의 비문은 사료가 부족한 4~5세기 고구려의 정치 · 사회사와 더불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 여러 세력들의 정세도 함께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의 치적을 새긴 광대토왕릉비의 비문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요 첫 부분에서는 추모왕인 주몽의 고구려 건국 이야기와 유리왕까지의 계보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고요 이어서 광개토왕의 영토확장과 관련된업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광개토왕 사후 장수왕의 즉위와 비석 건립 과정에 대해서 기록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주요 설화
관나부인 설화
교축일 설화
호동왕자 설화
유리태자 설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 15년 기록에는 호동왕자에 대하여 기록을 하면서 11월에 왕자(王子) 호동(好童)이 자살하니, 그는 왕의 차비(次妃), 즉 갈사왕 손녀(孫女)의 소생(所生)이었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대무신왕의 차비가 갈사왕의 손녀라면, 갈사왕은 고구려의 강함을 보고 자신의 손녀를 대무신왕에게 받쳐 화친을 맺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백제의 문학

백제의 문학은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습니다.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던 백제의 문학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백제 문학에서는 불교를 국가의 중심 사상으로 삼아 많은 불교 경전과 찬불가가 창작되었습니다.

백제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요 서동요와 같은 구비 문학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서동이 지은 서동요는 백제의 대표적인 구비 문학 작품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백제의 대표적인 구비 문학 작품인 서동요의 작자는 무왕이 아니라는 설도 많이 있습니다.

백제의 문학 작품중에서 아좌태자의 시는 당시의 고매한 풍류와 문학적 소양을 보여줍니다

 

향가

향가는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입니다.

향가는 사뇌가라고도 하는데요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로서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습니다.

향가의 구조적 형태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뉘며, 한자로 지은 노래도 있고, 이두로 지어진 노래도 있는데요 삼국시대 때는 4구체 향가가 많았으나, 남북국 시대 전기와 고려 초기로 가면서 8구체와 10구체 향가들이 다양하게 나오게 됩니다.

향가
사뇌가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
향찰로 기록
구조적 형태--- 4구체, 8구체, 10구체

 

 

처용가

향가인 처용가는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수록되어 있는데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은 것입니다.

처용가에서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처용가를 한문으로 옮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처용가는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계속 활용이 되게 됩니다.

 

고대의 기록

고대 문학은 돌을 비롯하여 점토판, 파피루스, 종려나무 잎, 금속 등 다양한 매체에 기록된 종교 및 과학 문서인데요 이외에 설화, 시와 희곡, 왕실 칙령과 선언문의 글로 구성이 되게 됩니다

초창기 고대문명의 경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점토판에 주로 기록을 하였고요 이집트 문명의 경우에는 파피루스에 기록을 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점토판에 주로 기록
이집트 문명--- 파피루스에 기록

 

이집트 문명에서는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 기록하는 가운데 상형문자를 사용하였고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점토판에 주로 기록을 하는 가운데 설형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일어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내용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인류가 초창기에 기록한 기록물은 주로 돌을 이용하였습니다.

돌에 기록된 대표적인 기록물에는 함무라비 법전이 있고요 이외에 각 각국가별려 돌에 기록내용들을 남겼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 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고대 바빌로니아 의 법전인데요 아카드어 가 사용되어 설형문자 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등 100여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함무라비 법전에 있는 몇 가지 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땅에 있는 나무를 베었다면 그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하다가 부주의한 사고로 다른 사람의 논에 물이 차게 만들었다면 그는 자신이 망가뜨린 곡식에 대해 변상해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들을 쫓아내고 싶다면 먼저 재판관 앞에 가서 "더 이상 내 아들과 함께 집에서 살 수 없습니다."하고 말해야 한다. 재판관은 그 이유를 살펴보고 합당하지 않으면 아들을 내쫓을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못된 짓을 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가 용서해 주지만 두 번째로 나쁜짓을 하면 아들을 내쫓을 수 있다.

도둑이 소나 양, 당나귀, 돼지, 염소중 하나라도 훔쳤더라도 그 값의 열 배로 보상해 주어야 한다. 도둑이 보상해 줄 돈이 없다면 사형당할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 자신의 눈알을 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이빨을 부러뜨렸다면 그의 이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부러뜨릴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게 되었다면 의사의 손은 잘릴 것이다.

건축가가 집을 지었는데 그 집이 무너져 주인이 죽음을 당하면 건축가는 사형에 처한다. 만약 집주인의 일가족이 죽었을 경우에는 목수의 가족중 해당되는 이가 죽어야 한다.

강도가 어떤 집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면 그 구멍 앞에서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을 사형에 처할 만하다고 하여 고소하고도 이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고소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궁중의 남녀 노예 혹은 자유민의 남녀 노예를 성문 밖으로 도주시킨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고요 만약 새로이 아내를 들이고도 그에대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부인에 대한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상류층에게 유리한 내용들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요 상류층에게 유리한 내용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노예라도 그가 주인에게 "이 자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주인은 자기 소유의 노예임을 입증하고 그 귀를 자를 권리를 가진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두 손을 자른다.

귀족의 뼈를 부러뜨린 자는 그의 뼈도 부러뜨린다.

귀족이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은화 1미나를 바쳐야 한다.

노예가 귀족의 뺨을 때리면 그의 귀를 자른다.

보복주의를 기초로 하는 함무라비 법전은 현재전하는 최초의 법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

메소포타문명의 대표적인 기록문학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시

가 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최초의 서사시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길가메쉬는 우루크의 지배자 인데요 우루크의 지배자 길가메쉬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 3분의 2는 신, 3분의 1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루크의 지배자 길가메쉬에 대하여 서술한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그의 압제에 불만을 터뜨리자 천신 아누와 모신 아루루는 길가메쉬의 힘을 낮추기 위해 엔키두라는 힘센 야만인을 만든다.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싸우고 예상외로 길가메쉬가 이기자 둘은 친구가 된다. 둘은 삼나무 숲의 괴물 파수꾼 훔바바를 정벌하는 모험을 떠나 그를 죽이고 우루크로 돌아온다. 길가메쉬가 여신 이슈타르(Ishtar)(수메르어로는 이나나)의 유혹을 뿌리치자 이슈타르는 아버지인 아누에게 길가메시를 징벌하기 위해 하늘의 황소를 내릴 것을 요청한다. 길가메쉬와 엔키두는 하늘의 황소를 죽인다.

엔키두가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죽인 데 분노한 신들이 엔키두를 죽인다. 친구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길가메쉬는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죽지 않는 유일한 인간인 우트나피시팀과 그의 아내를 찾아 나선다.

고생 끝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나 대홍수에 대해 전해 듣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얻지만 모두 실패하고 우루크에 돌아온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 점토판에는 대홍수와 방주의 건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기원전 650년경의 것으로 확인된 아시리아의 점토판은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에서 발견되어 현재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기원전 3세기 경의 길가메시 서사시의 원본 점토판은 인멸되었기 현재 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돌에 새긴 기록

우리나라의 경우 돌에 기록내용들을 남긴 것은 비석을 통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비석은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신라시대의 비석으로는 포항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 진흥왕순수비등이 있습니다.

중성리 신라비는 2009511일에 처음 발견되었는데요 당시 포항시에서 도로 공사를 하며 나온 돌들을 공사장 한곳에 모아두었는데, 공사장 부근인 포항시 흥해읍 학성리에 거주중인 주민이 화분 받침대로 쓰고자 이 돌을 가져오고자 했습니다. 이틀 후에 포크레인으로 약 10여미터 거리의 집에 가지고 왔는데, 묻은 흙이 비에 씻겨지며 글자가 드러나 경북매일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신고하였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중성리 신라비는 당시 왕경인이 현지인으로부터 빼앗았다 한 것을 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내용인데요 분쟁의 결과 조정에서 이를 재판하고, 그 판결을 고지한 내용입니다.

중성리 신라비에에는 "두지豆智 사간지궁沙干支宮과 일부지궁日夫智宮이 빼앗았다 하는 것을 다시 모단벌牟旦伐과 훼() 작민作民 사간지沙干支에게 돌려주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후 같은 일이 반복될시 중죄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데요신사년에 제작되어 501(지증왕 2) 혹은 441(눌지 마립간 21)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시기에 세운 비석인 중원고구려비는 남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고구려비입니다.

충주 고구려비는 197948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굴,조사되어 고구려 시대의 석비로 판명됐는데요 남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충주시는 고구려 시기에는 남부 거점인 국원성이었으며,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뒤 중원경으로 개칭했습니다.

충주가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흔히 '중원 고구려비라고하는데요 비석이 발견된 당시에도 마모가 심하게 진행되어 많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1979년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현재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충주가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시기에 발견되었던 중원고구려비의 내용일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5월에 고려태왕(高麗太王)의 상왕공(相王公)……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화목하고 천도를 지키기(守天)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7], 태자(太子) (), 전부(前部)의 대사자(大使者) 다혜환노(多兮桓奴) 주부(主簿) 도덕(道德) 등이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 공(太子 共)……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건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근대 문학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 장르로는 신체시를 비롯하여 신소설과 창가가사, 현대시조등이 있습니다.

신소설은 갑오개혁 이후의 개화기를 시대 배경으로 하여 이루어진 소설인데요 고대 소설과 현대 소설의 과도기적 소설로 볼수가 있습니다.

고대 소설과 현대 소설의 과도기적 소설인 신소설은 계급 타파와 자유 연애·자주 독립 등을 주장하면서 창작이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로는 이인직과 이해조를 들수가 있는데요 최초의 신소설 작품은 이인직이 지은 혈의 누입니다.

 

이해조

신소설을 가장 많이 창작한 인물은 이해조입니다.

이해조는 많은 신소설 작품들을 지었는데요 이해조의 신소설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910년 작인 자유종입니다.

이해조의 작품인 자유종은 기존의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사회적 개혁의식을 나타낸 소설인데요 한 부인의 생일잔치에 소개받은 다른 부인들이 모여 서로 돌아가면서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유종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진보적 관점이 매우 강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소설의 주제
계급 타파
자유 연애
자주 독립

 

신체시를 처음으로 개척한 최남선

근대 신체시를 처음으로 개척한 인물은 최남선인데요 근대 신체시를 처음으로 개척한 최남선은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소년 잡지의 창간호에 실렸던 작품입니다.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마지막 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ㄹ썩, ..........ㄹ썩, , ...........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 크고 純精(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ㄹ썩, ..........ㄹ썩, , 튜르릉, .

 

최초의 잡지인 소년

소년은 1908년 최남선이 발간한 대한민국 최초의 잡지인데요 잡지의 날은 소년 잡지의 발행일인 111일에서 유래했습니다.

잡지의 날
소년 잡지의 발행일인 111일에서 유래

 

대한민국 최초의 잡지인 소년은 최남선의 주도 하에 190811월부터 19115월까지 통권 23호를 발행하였습니다.

1908년 최남선이 발간한 대한민국 최초의 잡지인 소년은 역사, 지리를 비롯하여 어문학, 자연과학 등 다방면에 거친 근대적 지식을 전파하였습니다.

최남선이 발간한 잡지인 소년은 소년을 겨냥한 작품을 꾸준히 번역하였고요 소년의 계몽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최남선과 톨스토이 문학

최남선은 톨스토이 문학에 주목하였는데요 최남선은 슬라브 민족의 신비적인 성격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최남선은 신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톨스토이 문학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909년 소년 잡지 7월호에 실린 현시대대도사 톨스토이선생의 교시에서 최남선은 톨스토이를 '현시대 최대의 위인'으로 정의하였고요 톨스토이에 대해서 '그리스도 이후의 최대 인격'이라고 하였습니다.

191012월에 간행된 '톨쓰토이선생하세기념' 특집호에서는 톨스토이를 기리면서 한 사람이 얼마나 땅이 잇서야 하나와 차관, 너의 니웃을 소개했습니다.

1910년대부터 문학계에서는 근대문학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젊은 지식인들이 국민을 계몽하는 차원에서 다양한 사상지와 문학지들을 간행 하였습니다.

최초의 근대 문학지는 창조인데요 최초의 근대 문학지 창조는 1919년 김동인과 주요한이 일본에서 창간하였습니다.

창조
최초의 근대 문학지
1919년 김동인과 주요한이 일본에서 창간

 

 

근대 문학지

소년이 창간된 이후 근대 문학지들의 창간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최초의 근대 문학지는 김동인과 주요한이 창간한 창조입니다.

최초의 근대 문학지 창조가 1919년에 창간된데 이어 1920년에는 개벽이 창간 되었고요 1921년에는 신천지가 창간이 되었습니다.

근대 문학지
1919년에 창조 창간
1920년에 개벽 창간
1921년에 신천지 창간

 

이어서 1922년에는 신생활과 동명, 조선지광이 창간되었고요 1923년에는 금성이 창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조선문단이 창간이 되어 1936년까지 지속이 되었습니다.

이외에 1920년대에 창간된 문예지로는 1926년에 창간된 동광과 1927년에 창간된 현대평론도 있습니다.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

근대 문학지들이 많이 창간이 되는 가운데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들도 활발하게 간행이 되게 됩니다.

1920년대에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요 1920년대에 나온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로는 문예운동과 예술운동, 조선문예등이 있습니다.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
문예운동
예술운동
조선문예

 

조선문단

조선문단은 1924에 창간하였고요 1936에 종간이 되었습니다.

1924에 창간하였던 조선문단은 총 26호가 발간되었습니다.

26호가 발간되었던 조선문단은 동인지시대인 1920년에 탈 동인지적 성격을 가진 종합문예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였습니다.

 

1930년대의 문예지

1930년대에도 문예지의 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1930년에는 시문학이 발간이 되었고요 1931년에는 문예월간이 발간이 되었습니다.

시문학과 문예월간에 이어서 1933년에는 조선문학이 발간이 되었고요 1934년에는 문학과 삼사문학이 발간이 되었습니다.

이외에 1930년대에 나온 문예지들을 보면 1935년에 시원이 창간이 되었고요 1936년에는 시인부락과 풍림이 창간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1937년에는 자오선과 단층이 발간이 되었습니다.

사회계몽의 성격을 가진 비평중심의 일반 잡지로는 문장과 인문평론이 있습니다.

비평중심의 일반 잡지
문장
인문평론

 

근대에 발간된 동인지와 문예지들은 시대적 전환과 정치적 변화속에 대부분 오래가지 못하고 폐간되었습니다.

근대잡지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이 되었던 잡지는 한용운이 발행한 불교였습니다.

한국의 근대문학

 

한국의 근대소설

한국의 근대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학작품들은 많이 있는데요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에 나온 소설에는   이기영의 작품인 고향을 비롯하여  현진건의 작품인 고향과 빈처가 있습니다.

이외에   전광용의 작품으로 꺼삐딴리가 있고요   김유작품으로는 동백꽃과 만무방, 봄봄이 있습니다.

또 김동리의 작품인 <등신불> <무녀도> <역마> <황토기> <화랑의 후예>  를 비롯하여 채만식의 작품인 <레디메이드인생> <탁류> <치숙> <태평천하>가 있습니니다.

황순원의 작품으로는 독짓는 늙은이를 비롯하여 별과 소나기, 카인의 후예, 학등이 있습니다.

염상섭의 작품으로는 삼대를 비롯하여 만세전과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있습니다.

이효석의 작품으로는 메밀꽃 필 무렵이 있고요 이광수의 작품으로는 무정과 흙, 사랑이 있습니다.

동인지 창조를 주도한 작가인 김동인의 작품으로는 배따라기와 붉은 산이 있습니다. 이외에 계용묵의 작품으로는 백치아다다가 있고요   나도향의 작품으로는 벙어리 삼룡이가 있습니다.

김동인의 작품
배따라기
붉은 산

 

주요섭의 작품으로는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있고요   심 훈의 작품으로는 상록수가 있습니다.

이외에 손창섭의 작품으로 잉여인간이 있고요 이태준의 작품으로 해방전후가 있습니다. 또 박태원의 작품으로는 천변풍경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시

우리나라의 근대시인으로는 진달래꽃의 작가인 김소월을 비롯하여 나그네의 작가인 박목월, 서시의 작가인 윤동주, 광야의 작가인 이육사가 있고요 이외에 서정주 조지훈 정지용 신석정 한용운 박두진 김동환 김광균 유치환등이 있습니다.

이육사가 지은 광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근대적 소설 양식의 성립에 주력하였던 염상섭

소설에서 개성의 발견과 근대적 소설 양식의 성립에 주력하였던 염상섭은 1920년대 중반 이후에 발표한 소설들에서 식민지 조선의 빈곤과 정치적 박탈감을 담아내었습니다.

염상섭
근대적 소설 양식의 성립에 주력
식민지 조선의 빈곤을 묘사
정치적 박탈감을 강조


염상섭의 대표작인 만세전은 식민지의 처참한 상황을 외면하고자 했던 젊은 지식인이 일본인으로부터 받는 멸시와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목격하고 의식적 지향점을 반성한 작품입니다.


단편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일군 현진건

현진건은 단편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일군 작가로 평가받는 데요 단편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일군 작가로 평가받는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이나 빈처와 같은 작품을 통해 개인의 삶에 드리운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의 상황을 잘 묘사해내었습니다.

현진건의 단편 소설
운수 좋은 날
빈처

 

계급 문학 운동

1920년대에는 계급 문학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가 되게 됩니다.

계급 문학 운동은 카프(KAPF) 작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카프(KAPF) 작가들은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 잘 조명을 하였고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카프작가인 최서해는 홍염, 탈출기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가난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개인이 살인과 방화라는 극단적인 대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묘사하였습니다.

계급 문학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비롯이 되었습니다

1925년에 결성된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은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에 있어서 실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문학 운동 단체였습니다.
카프 작가들은 민족주의적 시각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계급문학을 표방하고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약자들을 사회 변화의 주체로 끌어올렸습니다.
카프의 초기 문학 운동은 이론적 측면에 치우쳐 문학적 형상화의 수준은 그리 높지 못하였습니다

카프의 결성과 이들의 문학 활동은 당시의 문학 흐름을 카프와 카프에 대항하는 근대 민족주의적 문학 운동의 대립 구도로 재편하게 됩니다.

근대 민족주의적 문학 운동
카프에 대항하면서 전개

 

예술지상주의

예술지상주의는 말 그대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주의인데요 예술의 목적은 인생이나 사회나 정치 등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술자체라는 것입니다

예술지상주의는 프랑스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가 1830년대 처음으로 주장한 것인데요 추리소설로 유명한 애드거 앨런 포우,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등이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한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예술지상주의 작가
애드거 앨런 포우
테오필 고티에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우리 나라에서 예술지상주의의 선두에 서 있는 작가는 김동인입니다

김동인
우리 나라 예술지상주의의 선구자
계몽주의에 반대
순수문학 운동 전개
붉은 산의 작가

 

붉은 산의 작가인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에 반대하여 순수문학 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예술지상주의는 유미주의와 관련이 깊은데요 유미주의는 탐미주의라고도 합니다

유미주의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인 미()를 최우선의 가치로 간주하는데요 정신보다는 감각을 중시하는 가운데 내용보다는 형식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습니다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문학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사 문학가로는 정극인을 들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사 문학가인 정극인은 조선 태종-성종 때의 문인인데요 호는 불우헌(不憂軒)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사 문학가인 정극인은 벼슬이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는데요 단종 폐위에 즈음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태인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사 문학가인 적극인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불우헌곡과 상춘곡이 있습니다.

정극인의 글을 모은 문집에는 불어헌집이 있습니다.

 

불우헌집(不憂軒集)

정극인의 글을 모은 문집인 불우헌집은 조선 정조 때 정극인의 후손 정효목이 정극인의 글을 모아 엮은 문집입니다.

정극인의 글을 모은 문집인 불우헌집에는 한문으로 된 시문들과 경기체가인 불우헌곡 가사 상춘곡 등이 있습니다.

불우헌가는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작품인데요 정극인인 고향 태인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칠 때 성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가자를 내리자 이에 감동하여 지었습니다.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작품인 불우헌가는 정극인의 문집인 불우헌집(不憂軒集)에 실려 있는데요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작품인 불우헌가의 내용은 세속에 대한 영화를 그리고 임금의 은혜가 지중함을 읊은 것인데요

정극인의 문집인 불우헌집(不憂軒集)에 실려 있는 불우헌가의 내용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뵈고시라 不憂軒翁 뵈고시라

時政惠養하신 口之於味 뵈고시라

뵈고뵈고시라 三品儀章 뵈고시라

光被聖恩하신 馬首腰問 뵈고시라."

 

상춘곡(賞春曲)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가사인 상춘곡은 가사 문학의 효시가 되는 작품인데요 자신의 문집인 불우헌집에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은 작가가 고향 태인에 돌아가 살 때의 봄의 경치를 읊은 것입니다.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은 모두 39행으로 되어 있는데요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1행부터 6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홍진(紅塵)에 뭇친 분네 이내 생애(生涯) 엇더ᄒᆞᆫ고

속세에 묻혀 사는 사람들아, 이 나의 삶이 어떠한가?

2-녯사ᄅᆞᆷ 풍류(風流)ᄅᆞᆯ 미ᄎᆞᆯ가 못 미ᄎᆞᆯ가

옛 사람의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3-천지간(天地間) 남자(男子) 몸이 날만ᄒᆞᆫ 이 하건마ᄂᆞᆫ

세상의 남자로 태어난 몸으로 나만한 사람이 많지마는

4-산림(山林)에 뭇쳐 이셔 지락(至樂)을 ᄆᆞᄅᆞᆯ 것가

산림에 묻혀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모른단 말인가

5-수간 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앏픠 두고

초가삼간을 맑은 시냇가 앞에 지어 놓고

6-송죽(松竹) 울울리(鬱鬱裏)예 풍월 주인(風月主人) 되어셔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한 숲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주인이 되어 있도다.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7행부터 13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7-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8-도화 행화(桃花杏花)ᄂᆞᆫ 석양리(夕陽裏)예 퓌여 잇고

복숭아꽃과 살구꽃은 석양 속에 피어 있고

9-녹양 방초(綠楊芳草)ᄂᆞᆫ 세우 중(細雨中)에 프르도다

푸른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푸르도다.

10-칼로 ᄆᆞᆯ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칼로 잘라냈는가? 붓으로 그려내었는가?

11-조화 신공(造化神功)이 물물(物物)마다 헌ᄉᆞᄅᆞᆸ다

조물주의 신통한 재주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구나.

12-수풀에 우ᄂᆞᆫ 새ᄂᆞᆫ 춘기(春氣)ᄅᆞᆯ ᄆᆞᆺ내 계워 소ᄅᆡ마다 교태(嬌態)로다

수풀에 우는 새는 봄기운에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13-물아 일체(物我一體)어니 흥()이ᄋᆡ 다ᄅᆞᆯ소냐

물아일체이거늘, 흥이야 다르겠는가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14행부터 20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시비(柴扉)예 거러 보고 정자(亭子)에 안자보니

사립문 주변을 걸어보기도 하고, 정자에 앉아 보기도 하니

15-소요 음영(逍遙吟詠)ᄒᆞ야 산일(山日)이 적적(寂寂)ᄒᆞᆫᄃᆡ

이리저리 거닐며 나직이 시를 읊조려 보며, 산 속의 하루하루가 적적한데

16-한중 진미(閑中眞味)ᄅᆞᆯ 알 니 업시 호재로다

한가로움 속의 참된 즐거움을 아는 이 없이 나 혼자로구나.

17-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여보게 이웃 사람들아, 산수 구경이나 가자꾸나.

18-답청(踏靑)으란 오ᄂᆞᆯ ᄒᆞ고 욕기(浴沂)란 내일(來日)ᄒᆞ새

풀을 밟는 것은 오늘하고, 목욕하는 일은 내일 하세.

19-아ᄎᆞᆷ에 채산(採山)ᄒᆞ고 나조ᄒᆡ 조수(釣水)ᄒᆞ새

아침에는 산에서 나물을 캐고, 저녁 때에는 낚시하세.

20-ᄀᆞᆺ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갓 다 쪄서 익은 술을 칡뿌리 두건으로 걸러 놓고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21행부터 28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1-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꽃나무 가지 꺾어서 잔 수를 세며 먹으리라.

22-화풍(和風)이 건ᄃᆞᆺ 부러 녹수(綠水)ᄅᆞᆯ 건너오니

화창한 봄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물결을 건너오니

23-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새 진다

맑은 향기는 술잔에 가득히 담기고, 붉은 꽃잎은 옷에 떨어진다.

24-준중(樽中)이 뷔엿거ᄃᆞᆫ 날ᄃᆞ려 알외여라

술동이가 비었거든 나에게 알리어라.

25-소동(小童) 아ᄒᆡ다려 주가(酒家)에 술을 믈어

아이를 시켜 술집에 술이 있는지를 물어서

26-얼운은 막대 집고 아ᄒᆡᄂᆞᆫ 술을 메고

어른은 지팡이를 짚고 아이는 술동이를 메고

27-미음완보(微吟緩步)ᄒᆞ야 시냇ᄀᆞ의 호자 안자

나직이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28-명사(明沙) 조ᄒᆞᆫ 믈에 잔 시어 부어 들고

맑은 모래 위로 흐르는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 부어 들고,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29행부터 32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9-청류(淸流)ᄅᆞᆯ 굽어보니 ᄯᅥ오ᄂᆞ니 도화(桃花)ㅣ로다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니 떠내려 오는 것이 복숭아꽃이로구나.

30-무릉(武陵)이 갓갑도다 져 ᄆᆡ이 긘 거인고

무릉도원이 가깝구나, 저 들이 무릉도원인가?

31-송간(松間) 세로(細路)에 두견화(杜鵑花)ᄅᆞᆯ 부치 들고

소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서 진달래꽃을 붙들고

32-봉두(峰頭)에 급피 올나 구름 소긔 안자보니

산봉우리 위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보니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의 마지막 종반부인 33행부터 39행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3-천촌 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러 잇ᄂᆡ

수많은 촌락이 여기저기 널려 있네.

34-연하일휘(煙霞日輝)ᄂᆞᆫ 금수(錦繡)ᄅᆞᆯ 재폇ᄂᆞᆫ ᄃᆞᆺ

안개와 노을과 빛나는 햇살은 수 놓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구나

35-엇그제 검은 들이 봄빗도 유여(有餘)ᄒᆞᆯ샤

엊그제까지 거뭇거뭇하던 들판에 봄빛이 넘쳐 흐르는구나.

36-공명(功名)도 날 ᄭᅴ우고 부귀(富貴)도 날 ᄭᅴ우니

명예와 부귀도 나를 꺼리니

37-청풍 명월(淸風明月) ()예 엇던 벗이 잇ᄉᆞ올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외에 그 어떤 벗이 있겠는가

38-단표 누항(簞瓢陋巷)에 흣튼 혜음 아니 ᄒᆞᄂᆡ

누추한 곳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헛된 생각을 아니 하네.

39-아모타 백년 행락(百年行樂)이 이만ᄒᆞᆫᄃᆞᆯ 엇지ᄒᆞ리

아무튼 백년 즐겁게 지내는 게 이만한들 어찌하리

 

화전별곡을 지은 김구

조선 중종 때의 문인인 김구가 지은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인 화전별곡이 있습니다.

조선 중종 때 문인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졌는데요 김구가 남해로 귀양갔을 때 남해에 있는 화전의 풍경과 생활을 그린 것입니다.

조선 중종 때 문인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은 자신의 문집 자암집(自庵集)에 실려 있습니다.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 제1장의 내용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의 끝, 땅의 변두리, 한 떨기 신선이 사는 섬.

왼쪽은 망운산(望雲山)이고, 오른쪽은 금산(錦山), 봉내와 고내 흐르고,

산천이 기묘하게 뛰어나 호걸과 준사(俊士)들이 모였나니, 인물이 번성했네.

, 하늘 남쪽 경치가 아름다운 곳의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풍류와 주색을 즐기는 한 시절의 인걸들,

, 나까지 몇 분입니까!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 제2장의 내용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별시위(河別侍衛)의 지란(芝蘭)와 영지(靈芝) 무늬를 새긴 품대(品帶), 나이와 관작이 아울러 높고,

박교수(朴敎授)가 취한 가운데 이리저리 손 휘젖는 버릇.

강륜(姜綸)의 잡담과 방훈(方勳)의 코 골며 자는 모습, 정기(鄭機)가 먹고 마시는 모습.

, 품계를 지닌 벼슬아치들이 화목하게 모여 있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하세연 씨(河世涓氏)가 재주를 뽐내면서 읊는 풍월, 하세연 씨가 재주를 뽐내면서 읊는 풍월.

, 시를 지어 부르고 화답하는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삼국시대의 문학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는 5언절구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입니다.

여수장우중문시
5언절구
을지문덕의 작품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인 여수장우중문시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귀공의 귀신 같은 계책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다 꿰었고

신묘한 이치는 하늘을 깨달았다

전쟁에 이겨 쌓은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랴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무공도 훌륭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인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인 여수장우중문시에서는 수나라의 장수인 우중문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권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인 여수장우중문시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Sui General Yu Zhongwen

Heaven knows how marvelous you are in your strategy,

Earth knows how shrewd you are in your calculation.

Your name already knows no bounds in this war,

Time to know satisfaction in your toil.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인 여수장우중문시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神策究天文

신 책 구 천 문

妙算窮地理

묘 산 궁 지 리

戰勝功旣高

전 승 공 기 고

知足願云止

지 족 원 운 지

 

신라의 향가

신라의 대표적인 문학장르로는 향가가 있습니다.

신라의 향가는 승려들의 작품이 많고요 화랑들도 향가를 지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대구화상과 각간 위홍이 향가집인 삼대목을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신라의 향가는 모두 14수인데요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신라의 향가는 4구체와 8구체, 10구체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신라의 향가중에서 4구체 향가로는 서동요를 들수가 있습니다.

4구체 향가인 서동요는 백제의 무왕이 지은 작품입니다.

신라의 향가는 고려초기까지 이어지게 되는데요 고려의 예종은 향가형식의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는 도이장가를 지었습니다.

고려의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과 김락을 추모하는 노래입니다.

10구체 향가의 대표작으로는 찬기파랑가가 있는데요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향가인 찬기파랑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

충담사가 지은 10구체 향가인 찬기파랑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열치매

드러나 ᄇᆞᆯᄀᆞᆫ ᄃᆞ리

흰 구루믈 조차 ᄠᅥ가ᄂᆞᆫ 어듸이오

모래 파른 믈ᄀᆞᅀᅢ

耆郞의 지시사 고자

이론 냇 쟉벼리에

이 디녀 괴여샨

ᄆᆞᅀᆞᄆᆡ ᄀᆞᅀᆞᆯ 조차제

阿耶 잣가지 놉하

누니 몰나올 花判이요

 

열어 젖히니

드러난 밝은 달이

흰 구름을 따라 떠 가는 곳 어디인가

모래 파 들어간 물가에

耆郞의 모습인 꽃이여

이른 냇 조약돌에

이 지녀 아끼신

마음의 가를 따르련다

阿耶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 모를 花判이여

 

헌화가

헌화가는 꽃을 바치는 노래인데요 4구체 형식의 신라의 향가입니다.

꽃을 바치는 노래인 헌화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려 있는데요 통일신라시대 성덕왕 때 작품이지만 지은이는 알 수가 없습니다.

향가인 헌화가의 원문은 삼국유사에 잘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헌화가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慚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헌화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모죽지랑가

모죽지랑가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8구체 향가 입니다.

득오가 화랑인 죽지랑(竹旨郎)을 사모하여 지었다는 노래인 모죽지랑가는 삼국유사(三國遺事)2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 竹旨郎條)에 관련설화와 함께 가사가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 효소왕 때 득오가 지은 8구체 향가인 모죽지랑가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화랑도가 세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암시적으로 보여 주는 노래입니다.

득오곡은 죽지랑을 사모해서 이 노래를 지었는데요 삼국유사에 기록된 모죽지랑가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去隱春皆林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모죽지랑가의 현대어 풀이

득오곡이 지은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인 모죽지랑가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하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인 모죽지랑가는 지나간 봄을 그리며 시름에 젖고 죽지랑의 아름답던 모습이 쇠함을 바라보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득오곡은 모죽지랑가에서 죽지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잘 나타내었습니다.

죽지랑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요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화랑입니다.

모죽지랑가
득오곡의 작품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는 노래

 

근대의 문학

 

과도기적인 문학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시가에서도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의 작품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받았는데요 시 문학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통적인 시조와 가사 외에도 다양한 시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요 전통적인 가사가 변한 개화가사도 있었고, 서양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창가도 있었습니다.

개화가사와 창가는 글자수에 엄격한 제약이 존재했습니다. 개화가사는 4 · 42행으로 대구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창가는 7 · 5조를 기본 율격으로 반드시 글자수를 지켜야 했습니다.

 

개방성을 추구했던 신체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등장한 신체시는 형태적인 고정성에서 벗어나 시적 형식의 자유로움과 개방성을 추구했습니다. 비록 뚜렷한 한계는 있었지만 근대 자유시가 형성되는 데에 계기를 만들어준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는 최남선의 작품인 해에게서 소년에게입니다.

최남선의 작품인 해에게서 소년에게 첫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ㄹ썩, ······ㄹ썩, , ······.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ㄹ썩, ······ㄹ썩, , 튜르릉, .

 

근대화 과정에서 등장한 신체시는 우리 시에서 최초로 정형률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정형률을 깨뜨리기는 했지만 신체시를 근대적인 자유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근대화 시기에 나온 시가인 신체시는 개인의 정서를 표현하기보다 계몽적인 주제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근대 시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근대 자유시

우리나라에서 근대 자유시는 1910년대에 들어와서 창작되었습니다.

근대 자유시를 개척한 주요 인물로는 김억과 주요한등을 들수가 있습니다.

김억과 주요한 같은 시인들은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를 소개하면서 신체시보다 형식적으로 자유로우며 시적 형식과 리듬을 중시한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자유시는 주요한 지은 불놀이입니다.

주요한 불놀이 중에서 첫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四月)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는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는 민중 계몽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적인 정서가 시적으로 표현된 작품 입니다.

 

서구 문학을 소개한 잡지

우리나라에 서구 문학을 소개한 잡지에는 최남선이 만든 소년을 비롯하여 창조, 백조, 폐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서구 문학을 보다 본격적으로 소개한 잡지로는 김억 등이 창간한 동인지인 태서문예신보가 있습니다.

김억 등이 창간한 동인지인 태서문예신보에는 서구의 근대 시를 비롯하여 당대의 최신 시와 시 이론까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한 김억은 태서문예신보에 다양한 서구의 시들을 번역하여 실었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오뇌의 무도라는 번역 시집을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의 문학작품들을 소개한 태서문예신보는 1918926일자로 창간되었고요 1919217일까지 발행된 후 종간이 되었습니다.

통권 16호를 내고 종간된 주간 문예잡지인 태서문예신보는 타블로이드판 8면으로 매주 간행되었습니다.

1918926일자로 창간되었던 태서문예신보의 발행인은 윤치호였고요 주간 겸 편집인은 장두철이었습니다.

태서문예신보는 편집인 장두철이 3·1운동에 참여하고 상해로 망명하게 되면서 종간이 되게 됩니다. 창간사에서는 본보는 저 태셔의 유명한 쇼설 · 시됴 · · 가곡 · 음악 · 미슐 · 각본 등 일반 문예에 관한 기사를 소개한다고 하였습니다.

서양의 문학작품들을 소개한 태서문예신보는 매호 권두에 사설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창작시를 비롯하여 번역시 · 창작소설 · 번안소설을 비롯하여 외국 문학이론 등을 실었습니다.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

불놀이는 주요한이 지은 작품인데요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는 우리나라 자유시의 효시로서 19192월 창조 창간호에 발표되었던 작품입니다.

불놀이
주요한이 지은 작품
자유시의 효시
창조 창간호에 발표
최초의 근대 서정시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는 우리나라 자유시의 효시인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서정시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는 5연으로 되어 있는데요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 첫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아, 날이 저문다, 서편 하늘에, 외로운 강물 위에, 스러져 가는 분홍빛 놀 ······ 아아, 해가 저물면,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4월이라 파일날, 큰 길을 물밀어 가는 사람 소리는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 2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시뻘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위에서 내려다보니, 물 냄새, 모래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엇이 부족하여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젊은 사람은 과거의 퍼런 꿈을 찬 강물 위에 내던지나 무정(無情)한 물결이 그 그림자를 멈출 리가 있으랴? - 아아, 꺾어서 시들지 않는 꽃도 없건마는,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 버릴까, 이 설움 살라 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쌍히 여겨 줄 이나 있을까 ······ 할 적에 , ’, 불티를 날리면서 튀어나는 매화포[2]. 펄떡 정신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더 강렬한 열정에 살고 싶다. 저기 저 횃불처럼 엉기는 연기, 숨막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 살고 싶다고 뜻밖에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나의 마음 ······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 3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달 따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淸流碧), 모란봉(牡丹峯) 높은 언덕 위에 허어옇게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 적마다 불빛에 물든 물결이 미친 웃음을 웃으니, 겁 많은 물고기는 모래 밑에 들어박히고, 물결치는 뱃속에서 졸음 오는 니즘의 형상(形像)이 오락가락 어른거리는 그림자, 일어나는 웃음소리, 달아 논 등불 밑에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뜻밖에 정욕(情慾)을 이끄는 불 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잔 한잔 또 한잔 끝없는 술도 인제는 싫어, 지저분한 배 밑창에 맥없이 누우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 없는 장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부리는 욕심에 못 견디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어나가면, 뒤에 남는 죽어 가는 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위에 조을 때, 뜻 있는 듯이 찌걱거리는 배젓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주요한이 지은 불놀이 4,5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상한 웃음이다, 차디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웃음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綾羅島)까지, 물사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기 너의 애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곧추 너의 뱃머리를 돌리라. 물결 끝에서 일어나는 추운 바람도 무엇이리오, 괴이(怪異)한 웃음소리도 무엇이리오, 사랑 잃은 청년의 어두운 가슴 속도 너에게야 무엇이리오,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 오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

 

우리나라의 전통 문학

 

고구려의 문학

삼국은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적인 접촉을 하는 가운데 한문을 수용하였습니다.

고구려는 국가 교육 기관인 태학에서 한자를 비롯하여 중국 고전을 교육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서로는 유기(留記)가 있었는데요 유기는 뒤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으로 다시 편찬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역사서
유기(留記)
신집

 

고구려의 유리왕은 황조가를 지었고요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장수인 을지문덕은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었습니다.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神策究天文

신 책 구 천 문

귀공의 귀신 같은 계책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다 꿰었고

妙算窮地理

산 궁 지 리

신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지리에 통달했구나

戰勝功旣高

전 승 공 기 고

전쟁에 이겨 쌓은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지 족 원 운 지

만족함을 알고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랴

 

고구려의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펄펄 나니는 저 꾀꼴새는

수놈과 암놈이 저리 정다운데

나의 외로움을 생각함이여

그 뉘와 함께 갈거나

 

황조가의 배경설화

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은 왕비 송씨가 죽자, 골천 사람의 딸 화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를 계실로 얻었는데요 이들이 서로 총애를 다투어 불화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리왕은 동서(東西) 양 궁()을 짓고 그들을 각각 두었습니다.

그후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궁을 비운 사이에 둘이 다투게 되었는데요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일 뿐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꾸짖으니, 치희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가게 됩니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쫓아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치희를 잃은 유리왕이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지은 작품이 황조가입니다.

황조가와 관련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에 나와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유리왕조에 나와있는 황조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펄펄 나니는 저 꾀꼴새는 수놈과 암놈이 저리 정다운데

나의 외로움을 생각함이여 그 뉘와곰 함께 갈거나

고구려의 2대왕인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의 내용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화랑 문학

신라에서는 화랑들을 중심으로 하여 화랑문학이 발달을 하였습니다.

신라는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는데요 이후 진한·마한·가락·가야 등을 통합하여 부족국가로서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경주 지역의 6부를 근거로 일어났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잦은 침략을 받으면서 시련도 겪었지만 태종무열왕과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하게 됩니다.

신라의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법흥왕과 진흥왕은 불교를 정치와 문화 방면에 이용하여 유··3교의 결정체인 원화(源花)와 화랑을 신봉하였습니다.

화랑과 관련된 기록은 김대문의 지은 화랑세기나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잘 나와 있습니다.

화랑과 관련된 기록
김대문의 지은 화랑세기
최치원의 난랑비서

김대문의 지은 화랑세기는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일부 내용들이 일본에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외에 계림잡전과 고승전도 지었습니다.

 

최치원의 난랑비서

최치원의 난랑비서에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라, 실은 3교를 포함하여 군생을 접화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 효하고, 나서는 나라에 충함은 노사구의 뜻이요, 하염없는 일에 처하여 말이 없는 교를 행함은 주주사의 종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의 화라 하였습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조하여볼때에 화랑제도는 진흥왕 때부터 비롯하여 신라 통일 때 그 무리가 큰 활약을 했습니다.

 

신라의 한문학

신라에서는 통일이후에 한문학이 크게 발달을 하였습니다.

신라는 강수, 설총 등의 한문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요 강수와 설총은 육두품 출신 귀족으로 신라 사회에서 새로운 지식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었던 계층 입니다.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신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문학이 발달을 하였는데요 통일신라시대의 한문학자로는 당나라에서 문장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인 최치원을 비롯하여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등이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한문학자
최치원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에 다녀온 유학생에 의해서 한시도 본격적으로 발달되는데요 한시는 최고 귀족층의 향가 문학에 대립하여 선진 지식층의 문학으로 성장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활약한 대표적인 한문학자는 최치원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최치원이 지은 대표적인 한시인 추야우중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秋風唯苦吟추 풍 유 고 음

가을 바람에 홀로 괴로이 읊조리니

世路少知音세 로 소 지 음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구나

窓外三更雨창 외 삼 경 우

창밖에는 삼경에 내리는 비

燈前萬里心등 전 만 리 심

등불 앞에는 만리 밖을 내닫는 마음(이라네)

 

우리나라의 악부

악부는 원래 중국에서 성행한 문학의 장르입니다.

우리나라의 악부 작품에는 이제현이 지은 소악부를 비롯하여 고려사 악지(樂志)에 있는 속악들이 있습니다.

기전체 역사서인 고려사의 악지(樂志)에 있는 속악들 이외에 신위의 소악부를 비롯하여 김종직의 동도악부(東都樂府)가 있고요 심광세의 해동악부와 신광수의 관서악부(關西樂府)등이 있습니다.

이외에 윤달선은 광한루악부를 지었습니다.

이제현이 지은 악부시인 소악부는 총 11수가 있으며 익재난고에 실려 있습니다.

이제현이 지은 악부시인 소악부는 고려 속요와 제주도 민요를 칠언 절구의 한시로 번안한 것입니다.

소악부
이제현이 지은 악부시
11
고려 속요와 제주도 민요를 칠언 절구의 한시로 번안

 

 

조선전기의 문학

 

조선 초기에는 격식을 존중하고 질서와 조화를 내세우는 경향의 문학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개인적 감정과 심성을 나타내려는 경향의 가사와 시조 등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초기의 문학작품으로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동문선등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가사에는 정극인의 상촌곡이 있습니다.

동문선은 성종 때 서거정, 노사신, 우리 민족문학 수립의 의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 까지 시와 산문 수록 정리한 것입니다.‘

조선전기의 설화문학 작품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를 비롯하여 성현의 용재총화,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있습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최초의 한문소설로도 불립니다.

 

16세기 문학

16세기에는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요 한시, 시조, 가사 분야가 발달을 하였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에는 문학과 도학의 일치를 내세워 왕도정신이 깃든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사림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문학은 방외인 문학이라고 하였는데요 이 부류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최경창을 비롯한 삼당시인이 있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에는 부녀자의 작품도 활기를 보였는데요 이 시기의 여성문학가로는 황진이를 비롯하여 허난설헌, 신사임당이 있습니다.

16세기의 여성문학가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 시기에 활약한 가사문학가로는 송순과 박인로, 정철등이 있는데요 정철의 문집인 송강가사에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외에 성상별곡과 속미인곡도 지었고요 최초의 사설시조인 장진주사도 지었습니다.

16세기에 활약한 삼당시인에는 최경창과 이달, 백광훈이 있는데요 이들은 자유분방한 인간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삼당시인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 시기에는 설화성격을 띤 문학도 성행을 하였는데요 이 부류의 작품으로는 어숙권의 패관잡기와 임제의 원생몽유록등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의 악장

악장은 궁중에서 개국의 위업을 찬양하고 제왕의 덕을 기리며 천하의 태평을 구가하는 노래 가사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동양적 통치 관례에 따라 필수적으로 따르는 예악정비의 일환으로 나라의 공식적 행사인 각종 연회에 쓰기 위하여 새로 지은 노래 가사들을 특별히 따로 묶어 악장이라 지칭하였습니다.‘

조선초기에 악장을 지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개국공신인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많은 악장들을 지었습니다.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는 조선의 새로운 도읍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이 지은 작품입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녜는 양쥬(楊州) 고올히여

디위예 신도형승(新都形勝)이샷다

개국셩왕(開國聖王)이 이 셩대(聖代)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당금경(當今景)잣다온뎌

셩슈만년(聖壽萬年)하샤 만민(萬民)의 함락(咸樂)이샷다

아으 다롱다리

알픠는 한강슈(漢江水)여 뒤흔 삼각산(三角山)이여

뎍듕(德重)하신 강산(江山) 즈으메 만세(萬歲)를 누리쇼셔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지은 서사시인데요 조선 왕조의 역대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는 모두 105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
세종 때 지은 서사시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
105책으로 구성

 

모두 10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용비어천가는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요 후대 임금은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경계하려는 데 편찬 목적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제1장은 해동 여섯 용이 날아 일마다 하늘이 주신 복이니, 이것은 옛 성인들의 고사와 부합한다는 내용입니다.

용비어천가의 제2장은 모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될만한 까닭이 있음을 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제2장은 조선왕조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노래한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고요 용비어천가의 가장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왕조창업의 천명성과 인물의 영웅성을 찬양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동명왕신화를 비롯하여 고려사 세계의 작제건설화(作帝建說話) 등의 내용들도 많이 차용을 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3장에서 8장까지는 조선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인물들의 행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어서 용비어천가의 9장부터는 태조의 위화회군에서 한양천도에 이른 경위를 기술 하였습니다.

이어서 27장 부터는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기적을 46장까지 기술하였다.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
태조의 비범한 모습을 노래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는 태조가 가장 큰 무공을 세운 왜적과의 싸움을 주로 노래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종반부인 110장에서 125장까지는 뒷임금들을 경계하는 내용을 노래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
태조가왜적과의 싸운 것을 노래

용비어천가는 44구의 한시체를 우리말로 언해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고요 한글이 나온 이후 한글을 사용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125개 장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태조에 대한 부분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문학 장르로 볼때에 악장이면서 서사시(敍事詩)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서사시적 구조는 제1장은 총서, 2~124장은 서사부, 125장은 총결로 되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구조
1--- 총서
2~124--- 서사부
125--- 총결

 

용비어천가 125장중에서 태조가 80개 장, 태종이 21개 장, 악조 9개 장, 도조 6개 장, 목조 3개 장, 환조 2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에서 조선의 첫왕인 태조는 탁월한 무술을 지닌 백전백승의 용장이며 정치적 역량도 뛰어난 인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문학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는 고조선시기의 작품인 공무도하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의 작가는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公竟渡河(공경도하)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墮河而死(타하이사)

가신 임을 어이할꼬.

當奈公何(당내공하)

공무도하가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시기에 지어진 시가인데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시가로 평가를 받오 있습니다.

고조선시기에 지어진 시가인 공무도하가는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설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고조선 시기의 설화인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조선의 뱃사공이었던 곽리자고가 새벽 일찍 일어나 배를 젓고 있는데, 백수 광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여기에서 백수 광부는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백수광부의 아내가 소리 높여 부르며 막으려 했으나, 다다르기 전에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백수 광부의 아내가 공후를 타며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고 아내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가 아내인 여옥에게 그 소리와 이야기를 들려주자, 여옥은 슬피 공후를 타며 그 소리를 이웃에게 전하였고, 이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

우국충정은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이라는 뜻인데요 조선시대에는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가 매우 많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 중 대표적인 것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입니다.

송강 정철의 작품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송강 정철이 50세가 되던 해에 조정에서 물러나 4년간 전남 담양에서 은거하며 있을 때 지어진 작품입니다.

송강 정철의 작품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은 뛰어난 우리말 구사와 세련된 표현으로 우리 나라의 가사 작품 중에 걸작으로 꼽히는데요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읊은 노래이기 때문에 왕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서 여성의 목소리를 채택하여 더욱 절실하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신하의 마음을 남편과 생이별한 한 여인의 그리움으로 바꾸어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미인곡은 계절의 변화에도 한결같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인데요 모두 63126구로 이루어진 이 가사는 전체의 구성이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는 속미인곡(續美人曲)이 있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

초창기의 시조에는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가 많은데요 대표적인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로는 목은 이색의 시조가 있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인 목은 이색의 시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의 시조는 고려의 기울어 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그 안타까운 심정을 자연물에 빗대어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고려 왕조가 점점 기울어져만 가는 상황속에서, 우국지사를 기다리는 지은이의 애타는 심정이 우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은 이색의 시조에서 백설고려 유신구룸은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 ‘매화우국지사, ‘석양기울어 가는 고려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
목은 이색의 시조
김상헌의 시조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작품이외에 우국충정을 읊은 시조는 병자호란이후 청나라에 볼모가 잡혀간 김상헌의 시조가 있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조는 김상헌이 병자호란 후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읊은 시조로서 청나라로 끌려가는 작자가 조국을 떠나면서 지은 노래인데요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의 정과 비분강개한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상헌의 시조에 나오는 삼각산한강수는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고유의 시인 시조

시조는 고려 시대에 처음 생겨 오늘날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시를 말합니다.

시조는 형식이 36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정형시라고 할 수가 있는 시조는 신분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쓸 수 있었던 만큼 내용도 다양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 자연속에 묻혀 살아가는 한가로움을 노래한 내용도 있고, 개인의 사랑과 그리움을 담기도 하였습니다.

 

시조의 종류

시조에는 길이에 따라서 평시조와 엇시조, 사설시조로 분류를 할 수가 있고요 이외에 연시조와 양장시조, 단장시조, 동시조등이 있습니다.

3장의 형식을 갖춘 평시조는 초장과 중장·종장이 각 15자 내외이고 총 45자 내외의 시조입니다.

엇시조는 평시조보다 초·중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 자수(字數)가 무제한으로 길어지고 종장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 시조를 말합니다.

사설시조는 사설이 있는 시조라는 의미인데요 평시조보다 초·중장이 제한없이 길고 종장도 어느 정도 길어진 시조를 말합니다.

사설시조는 장형시조라고도 합니다.

사설시조
사설이 있는 시조
장형시조

 

여러 수의 평시조가 연결된 연시조

연시조는 여러 수의 평시조가 연결된 시조를 말하는데요 연시조 작품으로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비롯하여 이이의 고산구곡가,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등이 있습니다.

이외에 주세붕의 오륜가, 이보길의 어부가 등도 대표적인 연시조 작품입니다.

 

양장시조

양장시조(兩章時調)는 중장이 없고 초장과 종장만으로 된 시조를 말하는데요 이은상이 시도했으나 요즈음에는 거의 사라진 형태입니다.

단장시조는 한자로 單章時調인데요 평시조를 더욱 압축하여 초·중장을 제쳐놓고 종장만으로 시조의 맛을 내게 하려는 시조를 말하는데요 실지로 실현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시조(童時調)는 어린이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낸 시조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연시조는 두 개 이상의 평시조가 하나의 제목으로 엮어져 있는 시조를 말하는데요 연형시조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작품으로는 주세붕이 지은 오륜가를 비롯하여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주세붕이 지은 오륜가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는 계절별로 10수씩 되어있는 가운데 모두 40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는 나이 65세 때 해남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지었는데요 춘사는 이른 봄에 고기잡이를 떠나는 광경을 동양화처럼 표현한 것이고요 여름부분인 하사는 소박한 어부의 생활을 노래하였습니다.

추사는 속세를 떠나 자연과 동화된 생활을 표현하였고요 마지막 동사는 은유를 통해 정계에 대한 작자의 근심하는 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고려말부터 작자 미상의 어부가(漁父歌)가 전해오던 것이 있었는데요 조선 중종 때 이현보가 이를 바탕으로 어부사(漁父詞)로 개작했고요 이어서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짓게 됩니다.

 

조선전기의 문학

 

조선 초기에는 격식을 존중하고 질서와 조화를 내세우는 경향의 문학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개인적 감정과 심성을 나타내려는 경향의 가사와 시조 등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조선초기의 문학작품으로는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동문선등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가사에는 정극인의 상촌곡이 있습니다.

동문선은 성종 때 서거정, 노사신, 우리 민족문학 수립의 의지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 까지 시와 산문 수록 정리한 것입니다.‘

조선전기의 설화문학 작품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를 비롯하여 성현의 용재총화,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있습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최초의 한문소설로도 불립니다.

 

16세기 문학

16세기에는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는데요 한시, 시조, 가사 분야가 발달을 하였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에는 문학과 도학의 일치를 내세워 왕도정신이 깃든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이황의 도산십이곡과 이이의 고산구곡가가 있습니다.

이 시기에 사림문학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문학은 방외인 문학이라고 하였는데요 이 부류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최경창을 비롯한 삼당시인이 있습니다.

사림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6세기에는 부녀자의 작품도 활기를 보였는데요 이 시기의 여성문학가로는 황진이를 비롯하여 허난설헌, 신사임당이 있습니다.

16세기의 여성문학가
황진이
허난설헌
신사임당

 

 

이 시기에 활약한 가사문학가로는 송순과 박인로, 정철등이 있는데요 정철의 문집인 송강가사에는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정철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외에 성상별곡과 속미인곡도 지었고요 최초의 사설시조인 장진주사도 지었습니다.

16세기에 활약한 삼당시인에는 최경창과 이달, 백광훈이 있는데요 이들은 자유분방한 인간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삼당시인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 시기에는 설화성격을 띤 문학도 성행을 하였는데요 이 부류의 작품으로는 어숙권의 패관잡기와 임제의 원생몽유록등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의 악장

악장은 궁중에서 개국의 위업을 찬양하고 제왕의 덕을 기리며 천하의 태평을 구가하는 노래 가사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동양적 통치 관례에 따라 필수적으로 따르는 예악정비의 일환으로 나라의 공식적 행사인 각종 연회에 쓰기 위하여 새로 지은 노래 가사들을 특별히 따로 묶어 악장이라 지칭하였습니다.‘

조선초기에 악장을 지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개국공신인 정도전입니다.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많은 악장들을 지었습니다.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는 조선의 새로운 도읍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이 지은 작품입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조선초기의 악장인 신도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녜는 양쥬(楊州) 고올히여

디위예 신도형승(新都形勝)이샷다

개국셩왕(開國聖王)이 이 셩대(聖代)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당금경(當今景)잣다온뎌

셩슈만년(聖壽萬年)하샤 만민(萬民)의 함락(咸樂)이샷다

아으 다롱다리

알픠는 한강슈(漢江水)여 뒤흔 삼각산(三角山)이여

뎍듕(德重)하신 강산(江山) 즈으메 만세(萬歲)를 누리쇼셔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지은 서사시인데요 조선 왕조의 역대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한 용비어천가는 모두 105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
세종 때 지은 서사시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기까지 여섯대의 행적을 노래
105책으로 구성

 

모두 105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용비어천가는 임금이 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걸쳐 피나는 노력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는데요 후대 임금은 어렵게 쌓아올린 공덕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경계하려는 데 편찬 목적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제1장은 해동 여섯 용이 날아 일마다 하늘이 주신 복이니, 이것은 옛 성인들의 고사와 부합한다는 내용입니다.

용비어천가의 제2장은 모든 일은 반드시 그렇게 될만한 까닭이 있음을 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제2장은 조선왕조의 영원무궁한 발전을 노래한 부분이라고 할 수가 있고요 용비어천가의 가장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왕조창업의 천명성과 인물의 영웅성을 찬양하고 선양하기 위하여 동명왕신화를 비롯하여 고려사 세계의 작제건설화(作帝建說話) 등의 내용들도 많이 차용을 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3장에서 8장까지는 조선왕조의 시조인 목조에서 환조에 이르는 인물들의 행적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어서 용비어천가의 9장부터는 태조의 위화회군에서 한양천도에 이른 경위를 기술 하였습니다.

이어서 27장 부터는 태조의 비범한 모습과 재주와 하늘의 도움을 받은 신기한 기적을 46장까지 기술하였다.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
태조의 비범한 모습을 노래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는 태조가 가장 큰 무공을 세운 왜적과의 싸움을 주로 노래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종반부인 110장에서 125장까지는 뒷임금들을 경계하는 내용을 노래하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47장부터 62장까지
태조가왜적과의 싸운 것을 노래

용비어천가는 44구의 한시체를 우리말로 언해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고요 한글이 나온 이후 한글을 사용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125개 장으로 되어 있는 가운데 태조에 대한 부분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는 문학 장르로 볼때에 악장이면서 서사시(敍事詩)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서사시적 구조는 제1장은 총서, 2~124장은 서사부, 125장은 총결로 되어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의 구조
1--- 총서
2~124--- 서사부
125--- 총결

 

용비어천가 125장중에서 태조가 80개 장, 태종이 21개 장, 악조 9개 장, 도조 6개 장, 목조 3개 장, 환조 2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용비어천가에서 조선의 첫왕인 태조는 탁월한 무술을 지닌 백전백승의 용장이며 정치적 역량도 뛰어난 인물로 묘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문학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는 고조선시기의 작품인 공무도하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의 작가는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인 공무도하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은 그예 물을 건너시네.

公竟渡河(공경도하)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墮河而死(타하이사)

가신 임을 어이할꼬.

當奈公何(당내공하)

공무도하가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當奈公何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시기에 지어진 시가인데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시가로 평가를 받오 있습니다.

고조선시기에 지어진 시가인 공무도하가는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설화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고조선 시기의 설화인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조선의 뱃사공이었던 곽리자고가 새벽 일찍 일어나 배를 젓고 있는데, 백수 광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여기에서 백수 광부는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 백수광부의 아내가 소리 높여 부르며 막으려 했으나, 다다르기 전에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백수 광부의 아내가 공후를 타며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고 아내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에 돌아가 아내인 여옥에게 그 소리와 이야기를 들려주자, 여옥은 슬피 공후를 타며 그 소리를 이웃에게 전하였고, 이 노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

우국충정은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하는 참된 마음이라는 뜻인데요 조선시대에는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가 매우 많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고전 시가 중 대표적인 것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입니다.

송강 정철의 작품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송강 정철이 50세가 되던 해에 조정에서 물러나 4년간 전남 담양에서 은거하며 있을 때 지어진 작품입니다.

송강 정철의 작품인 사미인곡(思美人曲)은 뛰어난 우리말 구사와 세련된 표현으로 우리 나라의 가사 작품 중에 걸작으로 꼽히는데요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읊은 노래이기 때문에 왕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기 위해서 여성의 목소리를 채택하여 더욱 절실하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미인곡은 임금을 사모하는 신하의 마음을 남편과 생이별한 한 여인의 그리움으로 바꾸어 표현을 하였습니다.

사미인곡은 계절의 변화에도 한결같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인데요 모두 63126구로 이루어진 이 가사는 전체의 구성이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는 속미인곡(續美人曲)이 있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

초창기의 시조에는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가 많은데요 대표적인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로는 목은 이색의 시조가 있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인 목은 이색의 시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 이색의 시조는 고려의 기울어 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그 안타까운 심정을 자연물에 빗대어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고려 왕조가 점점 기울어져만 가는 상황속에서, 우국지사를 기다리는 지은이의 애타는 심정이 우의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은 이색의 시조에서 백설고려 유신구룸은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 ‘매화우국지사, ‘석양기울어 가는 고려를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우국충정에 관한 시조
목은 이색의 시조
김상헌의 시조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작품이외에 우국충정을 읊은 시조는 병자호란이후 청나라에 볼모가 잡혀간 김상헌의 시조가 있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조는 김상헌이 병자호란 후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읊은 시조로서 청나라로 끌려가는 작자가 조국을 떠나면서 지은 노래인데요 나라를 생각하는 우국의 정과 비분강개한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상헌의 시조에 나오는 삼각산한강수는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고유의 시인 시조

시조는 고려 시대에 처음 생겨 오늘날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시를 말합니다.

시조는 형식이 36구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민족의 정형시라고 할 수가 있는 시조는 신분이나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쓸 수 있었던 만큼 내용도 다양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성, 자연속에 묻혀 살아가는 한가로움을 노래한 내용도 있고, 개인의 사랑과 그리움을 담기도 하였습니다.

 

시조의 종류

시조에는 길이에 따라서 평시조와 엇시조, 사설시조로 분류를 할 수가 있고요 이외에 연시조와 양장시조, 단장시조, 동시조등이 있습니다.

3장의 형식을 갖춘 평시조는 초장과 중장·종장이 각 15자 내외이고 총 45자 내외의 시조입니다.

엇시조는 평시조보다 초·중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 자수(字數)가 무제한으로 길어지고 종장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 시조를 말합니다.

사설시조는 사설이 있는 시조라는 의미인데요 평시조보다 초·중장이 제한없이 길고 종장도 어느 정도 길어진 시조를 말합니다.

사설시조는 장형시조라고도 합니다.

사설시조
사설이 있는 시조
장형시조

 

여러 수의 평시조가 연결된 연시조

연시조는 여러 수의 평시조가 연결된 시조를 말하는데요 연시조 작품으로는 맹사성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를 비롯하여 이이의 고산구곡가, 이황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등이 있습니다.

이외에 주세붕의 오륜가, 이보길의 어부가 등도 대표적인 연시조 작품입니다.

 

양장시조

양장시조(兩章時調)는 중장이 없고 초장과 종장만으로 된 시조를 말하는데요 이은상이 시도했으나 요즈음에는 거의 사라진 형태입니다.

단장시조는 한자로 單章時調인데요 평시조를 더욱 압축하여 초·중장을 제쳐놓고 종장만으로 시조의 맛을 내게 하려는 시조를 말하는데요 실지로 실현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동시조(童時調)는 어린이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낸 시조를 말합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연시조는 두 개 이상의 평시조가 하나의 제목으로 엮어져 있는 시조를 말하는데요 연형시조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작품으로는 주세붕이 지은 오륜가를 비롯하여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연시조
주세붕이 지은 오륜가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는 계절별로 10수씩 되어있는 가운데 모두 40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가는 나이 65세 때 해남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지었는데요 춘사는 이른 봄에 고기잡이를 떠나는 광경을 동양화처럼 표현한 것이고요 여름부분인 하사는 소박한 어부의 생활을 노래하였습니다.

추사는 속세를 떠나 자연과 동화된 생활을 표현하였고요 마지막 동사는 은유를 통해 정계에 대한 작자의 근심하는 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고려말부터 작자 미상의 어부가(漁父歌)가 전해오던 것이 있었는데요 조선 중종 때 이현보가 이를 바탕으로 어부사(漁父詞)로 개작했고요 이어서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짓게 됩니다.

 

조선초기의 문학

 

조선초기의 악장

조선초기의 악장은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전하고 있는 조선초기의 악장은 정도전의 작품 외에 윤회의 작품인 봉황음이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외에 작자 미상의 악장 작품으로는 유림가와 북전이 있습니다.

權近의 악장 작품으로는 상대별곡을 비롯하여 天監華山등이 있습니다.

권근의霜臺別曲과 변계량의 화산별곡은 경기체가 형식의 악장입니다.

이외에 상진이 지은 악장작품으로 임금의 은혜와 관련된 내용인 감군은이 더 있습니다.

상진이 지은 악장작품인 감군은의 전반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四海 바닷 기픠닫줄로 자히리어니와

님의 德澤 기픠줄로 자히리잇고

 享福無彊萬歲를 누리쇼셔

 享福無彊萬歲를 누리쇼셔

 一竿明月亦君恩이샷다.

 

새 도읍을 찬양한 신도가

정도전의 작품인 신도가는 조선이 건국된 후 새 도읍인 한양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새 도읍을 찬양한 노래인 신도가는 한시는 없고 국문 악장만 있습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지은 새 도읍을 찬양한 노래인 신도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楊州 올히여

디위예 新都形勝이샷다

開國聖王聖代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當今景 잣다온뎌

聖壽萬年萬民咸樂이샷다.

아으 다롱다리

漢江水여 뒤흔 三角山이여

德重江山 즈으메 萬世누리쇼셔

정도전은 신도가를 지은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습니다.

 전에는 양주 고을이던 곳에 세운 새 도읍은 모습이 뛰어나다 하고, 개국을 한 성왕이 성대를 일으켰다고 칭송했다.

서울의 성이 성답다고, 경치가 성답다고 감탄한 다음에, 왕조의 수명이 만 년이나 이어지는 동안에 모든 백성과 함께 즐기리라고 했다.

끝으로 앞은 한강수요 뒤는 삼각산인 경치를 들고서, 덕이 겹친 강산 사이에서 만세를 누리라고 축원했다.

천도를 하고, 새 서울 건설사업을 벌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기약하고자 하는 뜻을 잘 나타냈다.

그러기 위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덕담의 격식을 따랐다 하겠으며, 고려 속악가사에서 보이는 여음을 다시 썼다. 

 

경기체가의 부류

 경기체가는 크게 보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먼저 악장의 구실을 하는 경기체가를 들수가 있습니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찬양하고, 윤리적인 질서를 수립하자는 경기체가는 기능을 보아 악장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승려의 노래인 경기체가인데요 가사는 원래 승려의 노래였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사대부의 노래로 바뀌었습니다.

세번째 부류는 개인적인 노래인 경기체가 인데요 사대부가 자기 생활을 다루고 개인적인 관심을 표현한 작품이 차츰 많아져서 경기체가의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악장 구실을 하는 경기체가의 첫 작품은 권근이 지은 상대별곡입니다.

상대별곡에서 霜臺는 사헌부를 지칭합니다.

조선의 건국에 적극협력한 신진사대부인 권근은 정종 원년에 대사헌이 되었고요 대사헌이 된 후에 사헌부에서 하는 일을 칭송한 상대별곡을 지었습니다.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인데요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권근이 지은 상대별곡의 제1장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華山南 漢水北 千年勝地

廣通橋 雲鐘街 건나드러

落落長松 亨亨古栢 秋霜鳥府

萬古淸風긔 엇더니잇고

英雄豪傑 一時人才 英雄豪傑 一時人才

위 날조차 몃분니잇고

 상대별곡의 마지막의 제5장은 감격을 총괄하느라고 경기체가의 전형적인 형식에서 이탈했습니다.

 

변계량의 화산별곡

 세종시기에 지어진 변계량의 화산별곡은 서울을 찬양한 노래입니다.

변계량의 화산별곡에서 華山은 삼각산의 다른 이름인데요 서울을 지칭하는 말로도 사용이 됩니다.

화산별곡에서는 서울이 빼어난 고장이라고 칭송하면서어진 임금이 들어서서 훌륭한 정치를 베푸는 태평성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열거해 서술했습니다.

변계량의 화산별곡은 모두 8장으로 되어 있는데요 마지막의 제8장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勸農桑 厚民生 培養邦本

崇禮讓 尙忠臣 固結民心

德澤之克 風化之洽 頌聲洋溢

長治긔 엇더니잇고

華山漢水 朝鮮王業 華山漢水 朝鮮王業

幷久긔 엇더니잇고

 

조선시대 6조의 하나인 예조는 나라의 기풍을 담당한 곳인데요 노래를 관장했던 기관이기도 합니다. 성덕을 칭송하고 성수를 축원하는 것도 예조의 임무였습니다. 예조에서 지은 노래로는 경기체가가 있습니다.

오륜가와 연형제곡은 작자나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악장가사에 전하고 있습니다.

연형제곡은 세종 때의 작품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

오륜가와 연형제곡은 윤리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기체가가 존중되자 불교계에서도 경기체가를 받아들여 신앙의 대상을 찬양하는 노래로 삼았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불교가 억불정책 탓에 수세에 몰렸지만 유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불교가 유교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주장으로 불교를 옹호했습니다.

 

정극인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정극인이 있습니다.

 정극인은 지방 유생의 처지에서 어렵게 진출해 관위가 종4품에 이르렀는데요 세조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불교 숭앙을 반대해서 왕의 진노를 샀던 일이 있습니다.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은 52세에야 문과에 급제했는데요 만년에 치사하고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문학가인 정극인은 불우헌곡을 지었습니다.

불우헌곡은 모두 6장이며, 물러나서 후진을 가르치고 산수 사이에서 노닐다가 더욱 큰 은혜를 입으니 감격스럽다고 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는 불우헌곡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산사회 水重抱수중포 一畝儒宮일무유궁 向陽明향양명 開南牕개남창 名不憂軒명불우헌 左琴書좌금서 右博奕우박혁 隨意逍遙수의소요 樂以忘憂景何叱多낙이망우경하질다 平生立志평생입지 師友聖賢사우성현

 

遵道而行景何叱多준도이행경하질다 晚生員만생원 老及第노급제 樂天知命낙천지명 再訓導재훈도 三敎授삼교수 誨人不倦회인불권 家塾三間가숙삼간 鳩聚童蒙구취동몽 詳說句讀상설구독 諄諄善誘景何叱多순순선유경하질다 不亦樂乎불역낙호 負笈書生부급서생

 

自遠方來景何叱多자원방래경하질다 再上疏재상소 闢異端벽이단 依乎中庸의호중용 進以禮진이례 退以義퇴이의 守身爲大수신위대 備員霜臺비원상대 具臣薇垣구신미원 引年致仕인년치사 如釋重負景何叱多여석중부경하질다 一介孤臣일개고신 濫承天寵남승천총

 

再參原從景何叱多재삼원종경하질다 耕田食경전식 鑿井飮착정음 不知帝力부지제력 賞良辰상량신 設賓筵설빈연 兄弟朋友형제붕우 談笑之間담소지간 不遑他及불황타급 孝悌忠信효제충신 樂且有儀景何叱多낙차유의경하질다 舞之蹈之무지도지 歌詠聖德가영성덕

 

祈天永命景何叱多기천영명경하질다 尹之任윤지임 惠之和혜지화 我無能焉아무능언 聖之時성지시 顏之樂안지락 乃所願也내소원야 上不怨天상하원천 下不尤人하불우인 心廣體胖심광체반 不懼不憂景何叱多불구불우경하질다 不忮不求불기불구 何用不臧하용부장

 

古訓是式景何叱多고훈시식경하질다 壬辰歲임진세 四月初사월초 抑有奇事억유기사 降諭書항유서 到衡門도형문 閭里觀光여리관광 廉介自守염개자수 不求聞達불구문달 敎誨童蒙교회동몽 過蒙褒奬景何叱多과몽포장경하질다 特加三品특가삼품 時致惠養시치혜양

 

聖恩深重景何叱多성은심중경하질다 樂乎伊隱底낙호이은저 不憂軒伊亦불우헌이역 樂乎伊隱底낙호이은저 不憂人伊亦불우헌이역 作此好歌작차호가 消遣世慮景何叱多

 

조선시대의 문학가

조선시대의 문학가로는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와 송강 정철이 있고요 대표적인 연시조 작가로는 맹사성과 윤선도가 있습니다.

이외에 조선초기의 가사문학가로는 정극인이 있습니다.

조선초기의 가사문학가인 정극인은 자연을 노래한 상춘곡을 지었습니다.

이외에 성균관 대사성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주세붕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송강 정철

정유림의 아들인 정철은 조선시대 우의정, 좌의정, 전라도체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학자인데요 중종 31년에 태어나 선조 26년에 사망했습니다.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가졌던 정철은 관직 진출 전에 성산별곡을 지었고요 이후 관동지방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관동별곡과 임금을 사모하는 작품인 사미인곡 등을 지었습니다.

정여립 사건 때는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들을 가혹하게 숙청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문학적 자질을 가졌던 정철은 왕세자 책봉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때에 복귀했습니다.

이후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에 우거하다가 생을 마치게 됩니다.

 

임금을 사모하는 작품인 사미인곡

사미인곡은 임금을 그리는 정을 간곡하게 읊은 작품인데요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 있습니다.

정철이 충신연주(忠臣戀主)의 정을 남녀간의 애정에 비유하고 있는 가사인 사미인곡은 정철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고 낙향하여 머무르던 지은 작품인데요 충신이 임금을 사모하는 정을 한 여인이 지아비를 생이별하고 연모하는 정으로 비유하면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사미인곡
임금을 사모하는 작품
충신연주(忠臣戀主)의 정을 남녀간의 애정에 비유

 

사미인곡은 2음보 1구식 총 126구로 된 작품입니다. 사미인곡의 후속작품으로 속미인곡도 있는데요 속미인곡은 충신연주의 정을 두 여인의 대화체로 엮은 가사입니다.

 

성산별곡

성산별곡에서 성산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지곡리에 있는 지명인데요 정철이 당쟁으로 정계를 물러나 이곳에서 살 때 김성원을 위하여 이 작품을 지었습니다.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전라남도 담양은 현재 가사문학의 고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철은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하면서 이 작품을 지었습니다.

성산별곡의 전반부 내용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지나가는 나그네가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의 주인아 내 말을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고 아니 나오시는가.

솔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침대에 자리를 보아,

잠시 올라앉아 어떤가 하고 다시 보니,

하늘가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시내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산중에 벗이 없어 서책을 쌓아 놓고,

만고의 인물들을 거슬러 세어 보니,

성현도 많거니와 호걸도 많고 많다.

하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찌 무심하랴마는,

어찌 된 시운이 흥했다 망했다 하였는가.

모를 일도 많거니와 애달픔도 끝이 없다.

기산의 늙은 고불(古佛) 귀는 어찌 씻었던가.

소리가 난다고 핑계하고 표주박을 버린 허유의 조장이 가장 높다.

인심이 얼굴 같아서 볼수록 새롭거늘,

세상사는 구름이라 험하기도 험하구나.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느냐?

 

어부사시사를 지은 윤선도

윤선도는 조선의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인데요 정치인이자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연시조 작가인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이고됴 호는 고산(孤山)입니다.

윤선도는 조선시대 공조좌랑, 한성부서윤,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는데요 선조 20년에 태어나 현종 12년에 사망했습니다.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권신을 규탄하는 소를 올려 유배되기도 했는데요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의 확립과 강화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윤선도는 20여 년의 유배 생활을 하였고요 병자호란 때 왕이 항복하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보길도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어부사시사

윤선도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지은 작품이 어부사시사입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2년에 윤선도가 지은 연시조인데요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어부가와 이현보의 어부사의 전통을 계승한 것입니다.

어부사시사는 어촌의 아름다운 경치와 한가한 생활의 흥취를 계절별로 각 10수씩 40수로 읊은 작품입니다

 

주세붕

중종시기에 활약한 주세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주세붕은 성리학 이념의 보급을 통한 교화와 향촌사림의 배양을 위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했습니다.

주세붕은 중종 17년에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관직에 나간 주세붕은 홍문관의 정자와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사간원헌납을 역임했습니다.

주세붕은 김안로의 배척을 피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곤양군수로 나갔으나 이듬해 파직당했는데요 승문원교리를 거쳐 경상북도에 있는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습니다.

풍기군수를 역임한 주세붕은 성균관사성에 임명된 후,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을 역임하면서 요직들을 주로 거쳤습니다.

1549년에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고요 중앙에 있을 때는 주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습니다.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던 주세붕은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 진흥에 힘썼고요 지극한 효행과 청빈한 생활로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주세붕은 도학(道學)에 힘쓸 것도 주장하였는데요 유교 이념의 보급을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행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 재임시에는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썼는데요 당시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복구하기도 했습니다.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에 주세붕은 순흥 죽계(竹溪)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사당인 회헌사를 설립했습니다.

1543년에는 풍기의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는데요 백운동 서원은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한 것입니다.

백운동 서원
안향을 배향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
풍기의 교육기관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

 

백운동 서원은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후 향촌사림의 정치와 교육, 사회활동 기구로 자리잡게 됩니다.

 

해주에 수양서원 건립

주세붕은 황해도관찰사도 역임을 했는데요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여 최충을 모셨습니다.

해주에 있는 수양서원(首陽書院)에 모셔진 최충은 문하시중까지 지냈던 인물로 해동공자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수양서원
최충을 배향
주세붕이 해주에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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