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로 상고 시대 개벽(開闢)한 동이왕(東夷王)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권근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에서 옛날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 하강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따라서 단군(檀君)이라 하였다고 했고요 당시의 연대는 당요(唐堯) 원년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설을 듣자니 아득한 옛날 /
聞說鴻荒日단군님이 나무밑에 내리었다네 /
檀君降樹邊임금 되어 동쪽 나라 다스렸는데 /
位臨東國土저 중국 요 임금과 때가 같다오 /
時在帝堯天전한 세대 얼마인지 모르지만 /
傳世不知幾해로 따져 천 년이 넘었답니다 /
歷年曾過千그 뒷날 기자의 대에 와서도 /
後來箕子代똑같은 조선이라 이름하였네 /
同是號朝鮮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 |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Hear about the Day of the Flood
Tanjun descends to the edge of the tree
Located in the eastern land
When it was in Di Yaotian
I don't know how many people have passed it down
Over the years, there have been more than a thousand
Later Miko generation
The same number is North Korea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를 일본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洪水の日について聞く
木の端に降りるタンジュン
東の土地に位置
それがディヤオティアンにあったとき
何人の人がそれを受け継いだのかわかりません
何年にもわたって、1000以上ありました
後期巫女世代
同じ番号は北朝鮮です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는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 잘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의 후손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이 해부루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에 단군 기록이 가장 자세히 나오는 책은 세종실록 '지리지'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 거의 같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단군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설명하는 단군에 대한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 기록 |
조선시대에 단군 기록이 가장 자세히 나오는 책 |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 거의 유사 |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단군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해부루와 금와까지 등장을 시켰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는 환웅을 당웅천왕으로 표현했고요 단군은 단웅의 손녀와 단수신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서는 곰이 변화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를 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습니다.'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이름이 웅(雄)인 서자가 있었는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왔으니, 이가 단웅(檀雄) 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혼인해서 아들을 나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세워서 다스린 곳이다.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다.
이를 동부여의 왕이라 한다.단군은 요 임금과 같은 날에 임금이 되었고, 우 임금의 도산 모임에 이르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나라를 누린 지 1038년,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부루는 아들이 없어 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들을 얻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서는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세워서 다스린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은 고조선뿐만 아니라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도 통치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은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고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이라고 묘사를 하였습니다.
단군은 죽은 후에 구월산의 산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단군과 관련하여 구월산도 단군성지로 조명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단군에 대한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실린 것은 단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의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고조선을 1038년동안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서는 단군의 아들이 부루라고 하였고요 동부여의 왕 부루가 태자로 삼은 인물이 금와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단군은 동부여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단군 | |
고조선을 1038년동안 다스림 | |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됨 | |
부루 |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은 아들 |
금와 | 동부여의 왕 부루가 태자로 삼은 인물 |
고려와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시대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기록물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기록물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모두 고려 충렬왕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승려인 반면에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는 관료 출신입니다.
삼국유사는 비슬산 보당암과 청도 운문사, 군위 인각사에서 저술이 되었고요 제왕운기는 강원도 삼척 두타산에 있는 천은사라는 사찰에서 지어졌습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 |
삼국유사 | 승려 일연이 저술 |
제왕운기 | 관료출신인 이승휴가 기록 |
관료출신의 이승휴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왕운기를 지었습니다.
이승휴는 원나라 간섭기에 권문세족을 비판하다가 결국 파직을 당하였고요 강원도의 두타산에 후 은둔하면서 민족 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여러 가지 내용상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점도 많이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승려였던 반면에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는 유학자이자 관료 였습니다.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서적으로는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등이 있습니다.
응제시주는 권람이 권근의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고요 세종실록지리지는 문종때에 편찬이 되었습니다. 동국통감은 서거정등이 성종때에 편찬한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통사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조에 단군에 대해서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서적 |
응제시주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통감 |
권근은 응제시에서 옛날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요(堯)임금 원년 무진이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권람은 권근의 응제시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습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 웅(雄)이 있었다. 웅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웅은 천부인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은 신을 거느리면서 곡식ㆍ수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켰다. 그리하여 곰은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
단군은 아사달에서 말년과 최후를 맞았다고 하겠는데요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응제시주에 의하면 단군은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조선과 위만 조선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는 고조선인 데요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단군조선과 위만 조선 | |
단군조선 |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세운 나라 |
위만 조선 |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 |
단군조선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세운 나라이고요 위만조선은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입니다.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해서는 단군신화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단군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단군의 가계는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으로 연결이 되게 됩니다.
환웅의 아버지인 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오는데요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으로 추정이 됩니다.
환웅은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때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을 하게 됩니다.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熊女)가 환웅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은 1908세까지 살다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게 됩니다.
단군왕검 |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熊女)가 환웅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함 |
1908세까지 살다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됨 |
단군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등에 잘 나와 있습니다.
●위만에 세운 위만 조선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들어온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후 위만조선을 열게 됩니다.기원전 2세기에 중국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국경 수비를 맡겨달라고 했고요 준왕은 위만에게 국경을 맡겼지만 후에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게 됩니다.
위만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고요 연나라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위만은 우리 민족 사람들이 쓰는 모자인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합니다.고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위만은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고요 철기문화를 발달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빈다.
이외에 위만조선은 중국 한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진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됩니다.철기문화와 중계무역으로 발달하던 위만조선은 중국의 통일국가인 한나라의 침입을 받고 전쟁을 벌였고요 1년 동안 잘 버텼지만 기원전 108년에 중국 한나라에게 망하게 됩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4개의 군인 한사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단군에 대한 상소문
단군에 대한 내용은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상소문 | |
조선전기 | 변계량의 상소문 |
고려후기 | 백문보의 상소문 |
단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상소문으로는 조선전기에 있었던 변계량의 상소문과 고려후기에 있었던 백문보의 상소문이 있습니다.
조선전기 변계량의 상소문과 고려후기 백문보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는 단군에 대한 위상이 크게 강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중기로 가면서 성리학사상이 전성을 이루는 가운데 단군에 대한 위상은 약화가 되고 중화사상이 강조가 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부터 단군에 대한 위상은 차츰 올라가게 됩니다.
●단군에 대한 변계량의 상소문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단군을 사전에 등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변계량의 상소문에 영향을 받아 조선전기 태종때 부터 평양에 사당을 설치하고 단군에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와 함께 왕실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국인 중국에서만 행할 수 있었지만
변계량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우리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단군조선에서 찾았습니다. 변계량은 고려후기에 이승휴가 징느 제왕운기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단군의 건국 시점을 무진년으로 보았습니다.
조선전기에 단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에 조선중기로 가면서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을 크게 약화가 되게 됩니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추구되는 가운데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은 단군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기자를 존숭하였고요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국조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전기에 있었던 단군에 대한 변계량의 상소문 일부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입니다.
대저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이었으니, 지금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여 고친 적은 없습니다.”]
●단군에 대한 백문보의 상소문
고려후기에 백문보는 공민왕 시기에 있었던 흥왕사의 난 이후 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단군을 숭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백문보는 단군의 건국 시점을 3600년 전으로 보았고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기록보다 단군은 훨씬 이전의 인물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고려 시기 유행했던 도참설에 영향을 받아 백문보는 단군의 건국시점을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기록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백문보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지만 도참사상을 수용하는 가운데 단군을 우리민족의 시조로 보았습니다.
고려 후기 성리학자들 가운데는 단군을 국조로 이해하였던 인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고려 후기의 모든 성리학자가 단군 신화의 내용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데요 성리학자 중에는 신화적 색채가 짙은 단군 신화의 내용은 부정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려후기에 단군을 국조로 숭앙하던 풍조는 조선 시대 전기까지 이어지게 되니다다.
단군에 대한 백문보의 상소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00년이 하나의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여 하나의 대주원(大周元)이 됩니다. 이는 황제(皇帝)⋅왕패(王覇)와 이난흥쇠(理亂興衰)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었으니, 곧 주원(周元)의 기회입니다.
마땅히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도(道)를 쫓되 공리화복(功利禍福)을 논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하늘(上天)이 진실로 돕고 음양(陰陽)이 때를 맞추어 국운이 길어질 것입니다”]
이승휴는 원나라 간섭기에 신진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개혁을 주장하였고요 권문세족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휴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으면서 결국 파직을 당하였고요 이후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에서 은둔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습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통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널리 알리려 하였고요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는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와 함께 단군 신화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입니다.
제왕운기에 수록된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보다 내용은 길지가 않지만
단군 신화의 원형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제왕운기에서 밝힌 단군
제왕운기에서 밝힌 단군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壇君⋅神壇樹’라고 하였는데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서는 ‘檀君⋅神檀樹’라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부모를 환웅과 웅녀라고 한 반면에 제왕운기에서는 단수신(檀樹神)과 단웅천왕의 손녀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는 수목사상이 많이 포함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단군의 건국 연대에서 제왕운기에서는 ‘요 원년 무진(戊辰)’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이 부여와 고구려, 신라와 옥저(沃沮)⋅예(穢)⋅맥(貊)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曰雄, 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個,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云云. 令孫女, 飮藥成人身, 與檀樹神, 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 不死故也.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기(本紀)』에서 말하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고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이르기를 내려가서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그를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하였다.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은) 조선(朝鮮) 지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南沃沮)와 북옥저(北沃沮)⋅동부여(東夫餘)와 북부여(北夫餘)⋅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단군은)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니,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는데요 이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과 유사 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의 탄생과 관련하여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南沃沮)와 북옥저(北沃沮)⋅동부여(東夫餘)와 북부여(北夫餘)⋅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 관련 내용
단군---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신(檀樹神)사이에서 출생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됨
단군에 대한 기록
단군의 기록이 있는 우리나라 문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단군 이야기가 는 전해지는 책은 고려 충렬왕시기에 나온 책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이외에 조선시대의 책으로는 응제시주가 있습니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지어진 고려사와 동국사략,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단군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또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비서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비서들은 조선후기에 많이 나오게 됩니다.고려 우왕 때 권근이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가 단군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 하였습니다.
이때 권근은 '응제시'에 단군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이 '응제시'에 붙은 '응제시주'의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응제시주'에 있는 단군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들으니 태고의 먼 옛날나무 가에 내려온 단군동쪽 나라의 땅에 임하시니때는 요임금의 시대였다고 하네.'
응주시주에 있는 동쪽 나라의 땅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보았을 때 동쪽나라라는 것입니다.
'응제시주'에 있는 단군에 대한 내용은 길이가 매우 짧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습니다.조선 태종 때 편찬한 동국사략에도 단군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요 조선 세종때 편찬된 고려사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사략에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고(요 임금 25년 무진년),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나중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이것이 단군이다.'
동국사략에는 단군이 왕으로 추대된 시기가 요 임금 25년 무진년이라고 하였습니다.세종때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요 임금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이라 불렀다.'
동국사략의 단군에 대한 기록 |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 |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김 |
나중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됨 |
동국사략과 고려사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단군이 환웅의 아들이 아니고요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인물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의 단군에 대한 기록 |
'요 임금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 옴 |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평양에 도읍 |
단군과 관련한 기록
단군과 관련한 기록은 제왕운기와 동국통감, 세종실록지리, 삼국유사, 응제시주등에 있습니다.
제왕운기와 동국통감, 세종실록지리의 단군에 대한 내용은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경우 단군의 탄생에 대해서 주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 관련 기록
제왕운기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바라면서 지은 서사시입니다. 이승휴는 원나라 지배 하의 민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제왕운기를 저술했습니다.
이승휴가 원나라 지배 하의 민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지은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시로 엮은 것인 데요 상권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다루었고 하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승휴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기술을 하였습니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의 단군부분을 해석하면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열었느냐, 제석의 손자니 이름하여 단군이라]입니다.
이승휴는 단군을 제석의 손자라고 하였고요 제석의 손자인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 나와 있는 단군과 관련한 기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 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 爲王.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 爲神, 不死故也. 竝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今九月山也, 一名弓忽, 又名三危, 祠堂猶在. 享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 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 無君臣.
제왕운기에 나와 있는 단군과 관련한 기록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네.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는데 환웅(桓雄)이라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땅으로〉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弘益人間]?” 라고 하였으므로 환웅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분을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손녀(孫女)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남자 아이를 낳게 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하였다. 조선의 영역에 자리잡고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沃沮), 동북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註 001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으니, 〈이는 단군이〉 죽지 않은 까닭이다.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단군의 죽음 |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됨 |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다른 곳에서는 이후 164년 동안 비록 부자관계는 있었으나 군신관계는 없었다고 되어 있다.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단군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고요 아사달산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황해도의 구월산은 단군이 마지막으로 생을 보낸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단군이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단군이 죽은 연대는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이라고 하겠습니다.
단군의 사당은 구월산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에 단군릉을 조성하여 있습니다.
제왕운기의 기록대로 라면 단군의 시신은 황해도 구월산에 있어야 하는데요 평양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사실과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동국통감의 단군 관련 기록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내용은 동국통감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동국통감에는 단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竝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제요와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하왕조를 거치도록 궁궐에 계시다.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 또는 삼위라고 한다. 사당이 아직 있다)亨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1028년간 나라를 향유하셨으나, 어쩔 수 없이 변화함은 환인의 부르심이라.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그 뒤 164년 후에 어진 분이 군신관계를 다시 열었다.(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혹은 그 후 164년은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고 한다.)
동국통감에서는 단군이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요 아사달 산은 지금의 황해도 구월산을 말합니다.
단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국통감과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일치 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탄생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설명을 하였고요 단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은 1028년간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설명한 응제시주
●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應製詩註)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 응제시주입니다.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는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권근의 손자 권람이 자세히 주석을 붙여 엮은 책인 데요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는 세조 시기에 간행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은 13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무제의 어제시 3수를 받았고요 홍무제에게 바치는 응제시(應製詩) 24수를 지었습니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이 그 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 응제시주입니다.
응제시주 |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책 |
세조 시기에 간행 |
권근이 지은 응제시 자체와 권람의 주석 사이에는 역사 의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무제에게 바치는 시인 응제시(應製詩) 24수는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주의 주석
권람은 응제시에 주를 달면서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 웅(雄)이 있었다. 웅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고요 환웅은 천부인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또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은 신을 거느리면서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응제시주에서는 곰이 인간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도 잘 기록을 하였는데요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곰이 인간으로 변하여 웅녀가 된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켰다.
그리하여 곰은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곰이 인간으로 변한 것과 관련한 내용은 권람의 응제시주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한 응제시주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요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서는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라는 권람의 주장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라고 하면 단군조선은 이후 동부여로 연결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사달 산신이 된 단군
권근은 단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단군이 말년에 들어간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인데요
황해도의 구월산에는 단군을 모신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고 하였고요 단군이 세상을 떠난 후 164년이 지난 뒤에는 기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에 평양에 나라를 세운후 말년에는 아사달에 들어가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로 상고 시대 개벽(開闢)한 동이왕(東夷王)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권근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에서 옛날에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 하강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따라서 단군(檀君)이라 하였다고 했고요 당시의 연대는 당요(唐堯) 원년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설을 듣자니 아득한 옛날 /
聞說鴻荒日단군님이 나무밑에 내리었다네 /
檀君降樹邊임금 되어 동쪽 나라 다스렸는데 /
位臨東國土저 중국 요 임금과 때가 같다오 /
時在帝堯天전한 세대 얼마인지 모르지만 /
傳世不知幾해로 따져 천 년이 넘었답니다 /
歷年曾過千그 뒷날 기자의 대에 와서도 /
後來箕子代똑같은 조선이라 이름하였네 /
同是號朝鮮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 |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 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를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Hear about the Day of the Flood
Tanjun descends to the edge of the tree
Located in the eastern land
When it was in Di Yaotian
I don't know how many people have passed it down
Over the years, there have been more than a thousand
Later Miko generation
The same number is North Korea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를 일본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洪水の日について聞く
木の端に降りるタンジュン
東の土地に位置
それがディヤオティアンにあったとき
何人の人がそれを受け継いだのかわかりません
何年にもわたって、1000以上ありました
後期巫女世代
同じ番号は北朝鮮です
권근이 지은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는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 잘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의 후손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자신의 손자인 권람이 지은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이 해부루를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에 단군 기록이 가장 자세히 나오는 책은 세종실록 '지리지'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는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 거의 같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단군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기록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설명하는 단군에 대한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 기록 |
조선시대에 단군 기록이 가장 자세히 나오는 책 |
이승휴의 제왕운기의 내용과 거의 유사 |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단군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가운데 해부루와 금와까지 등장을 시켰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는 환웅을 당웅천왕으로 표현했고요 단군은 단웅의 손녀와 단수신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에서는 곰이 변화하여 웅녀가 되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를 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나오는 단군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습니다.'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에게 이름이 웅(雄)인 서자가 있었는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왔으니, 이가 단웅(檀雄) 천왕이다.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혼인해서 아들을 나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세워서 다스린 곳이다.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아 부루라 하였다.
이를 동부여의 왕이라 한다.단군은 요 임금과 같은 날에 임금이 되었고, 우 임금의 도산 모임에 이르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나라를 누린 지 1038년,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으니,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부루는 아들이 없어 금색 개구리 모양의 아들을 얻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로 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서는 조선,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이 세워서 다스린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은 고조선뿐만 아니라 남북 옥저, 동부여, 예와 맥도 통치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은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고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이라고 묘사를 하였습니다.
단군은 죽은 후에 구월산의 산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단군과 관련하여 구월산도 단군성지로 조명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단군에 대한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 실린 것은 단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서 나라를 처음 열었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의 기록에 의하면 단군은 고조선을 1038년동안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양조에서는 단군의 아들이 부루라고 하였고요 동부여의 왕 부루가 태자로 삼은 인물이 금와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단군은 동부여와도 많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단군 | |
고조선을 1038년동안 다스림 | |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됨 | |
부루 |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낳은 아들 |
금와 | 동부여의 왕 부루가 태자로 삼은 인물 |
고려와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고려시대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기록물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기록물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모두 고려 충렬왕시기에 지어졌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은 승려인 반면에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는 관료 출신입니다.
삼국유사는 비슬산 보당암과 청도 운문사, 군위 인각사에서 저술이 되었고요 제왕운기는 강원도 삼척 두타산에 있는 천은사라는 사찰에서 지어졌습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 |
삼국유사 | 승려 일연이 저술 |
제왕운기 | 관료출신인 이승휴가 기록 |
관료출신의 이승휴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왕운기를 지었습니다.
이승휴는 원나라 간섭기에 권문세족을 비판하다가 결국 파직을 당하였고요 강원도의 두타산에 후 은둔하면서 민족 서사시인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여러 가지 내용상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점도 많이 있습니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이 승려였던 반면에 제왕운기를 지은 이승휴는 유학자이자 관료 였습니다.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서적으로는 응제시주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등이 있습니다.
응제시주는 권람이 권근의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고요 세종실록지리지는 문종때에 편찬이 되었습니다. 동국통감은 서거정등이 성종때에 편찬한 우리나라의 전체적인 통사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 평양조에 단군에 대해서 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서적 |
응제시주 |
세종실록지리지 |
동국통감 |
권근은 응제시에서 옛날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요(堯)임금 원년 무진이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권람은 권근의 응제시에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습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 웅(雄)이 있었다. 웅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웅은 천부인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다. 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은 신을 거느리면서 곡식ㆍ수명ㆍ질병ㆍ형벌ㆍ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켰다. 그리하여 곰은 삼칠일(三七日: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함께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매양 단수(檀樹) 아래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임금과 같은 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며, 그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 그 후 164년이 지난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
단군은 아사달에서 말년과 최후를 맞았다고 하겠는데요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응제시주에 의하면 단군은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조선과 위만 조선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는 고조선인 데요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으로 구분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단군조선과 위만 조선 | |
단군조선 |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세운 나라 |
위만 조선 |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 |
단군조선은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세운 나라이고요 위만조선은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입니다.
●최초의 국가인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해서는 단군신화에 잘 나타나 있는데요 단군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단군의 가계는 환인(桓因)과 그 아들 환웅(桓雄), 그리고 환웅의 아들인 단군으로 연결이 되게 됩니다.
환웅의 아버지인 환인은 단군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환웅이 아버지 환인의 도움과 허락을 얻어서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오는데요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으로 추정이 됩니다.
환웅은 신단수(神壇樹) 아래 신시(神市)를 베풀고는 스스로 환웅천왕이라 칭하면서 인간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때 곰이 호랑이와 함께 사람되기를 원하였다가 곰만 사람 여자로 화신을 하게 됩니다.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熊女)가 환웅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단군은 1908세까지 살다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되게 됩니다.
단군왕검 |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熊女)가 환웅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 |
평양에 도읍을 정한 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함 |
1908세까지 살다가 아사달산의 산신이 됨 |
단군에 대한 내용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응제시주, 세종실록지리지등에 잘 나와 있습니다.
●위만에 세운 위만 조선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들어온 위만은 준왕을 몰아낸 후 위만조선을 열게 됩니다.기원전 2세기에 중국 연나라에서 들어온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국경 수비를 맡겨달라고 했고요 준왕은 위만에게 국경을 맡겼지만 후에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게 됩니다.
위만은 ‘조선’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고요 연나라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위만은 우리 민족 사람들이 쓰는 모자인 상투를 틀고 있었다고 합니다.고조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위만은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철기 문화를 받아들였고요 철기문화를 발달시키면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빈다.
이외에 위만조선은 중국 한나라와 한반도 남부의 진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게 됩니다.철기문화와 중계무역으로 발달하던 위만조선은 중국의 통일국가인 한나라의 침입을 받고 전쟁을 벌였고요 1년 동안 잘 버텼지만 기원전 108년에 중국 한나라에게 망하게 됩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에 4개의 군인 한사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단군에 대한 상소문
단군에 대한 내용은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상소문 | |
조선전기 | 변계량의 상소문 |
고려후기 | 백문보의 상소문 |
단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상소문으로는 조선전기에 있었던 변계량의 상소문과 고려후기에 있었던 백문보의 상소문이 있습니다.
조선전기 변계량의 상소문과 고려후기 백문보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이 시기에는 단군에 대한 위상이 크게 강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중기로 가면서 성리학사상이 전성을 이루는 가운데 단군에 대한 위상은 약화가 되고 중화사상이 강조가 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를 더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부터 단군에 대한 위상은 차츰 올라가게 됩니다.
●단군에 대한 변계량의 상소문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단군을 사전에 등재하여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변계량의 상소문에 영향을 받아 조선전기 태종때 부터 평양에 사당을 설치하고 단군에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와 함께 왕실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었습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국인 중국에서만 행할 수 있었지만
변계량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전기에 변계량은 우리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단군조선에서 찾았습니다. 변계량은 고려후기에 이승휴가 징느 제왕운기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단군의 건국 시점을 무진년으로 보았습니다.
조선전기에 단군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에 조선중기로 가면서 단군에 대한 숭배의식을 크게 약화가 되게 됩니다.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적 이상주의가 추구되는 가운데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은 단군보다 중국에서 들어온 기자를 존숭하였고요 우리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국조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전기에 있었던 단군에 대한 변계량의 상소문 일부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이 시조입니다.
대저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천자가 분봉(分封)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唐堯)의 무진년(戊辰年)이었으니, 지금까지 3000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한 1000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여 고친 적은 없습니다.”]
●단군에 대한 백문보의 상소문
고려후기에 백문보는 공민왕 시기에 있었던 흥왕사의 난 이후 조정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단군을 숭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백문보는 단군의 건국 시점을 3600년 전으로 보았고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기록보다 단군은 훨씬 이전의 인물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고려 시기 유행했던 도참설에 영향을 받아 백문보는 단군의 건국시점을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의 기록보다 훨씬 이전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백문보는 고려 후기에 성리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지만 도참사상을 수용하는 가운데 단군을 우리민족의 시조로 보았습니다.
고려 후기 성리학자들 가운데는 단군을 국조로 이해하였던 인물이 매우 많았습니다. 고려 후기의 모든 성리학자가 단군 신화의 내용까지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데요 성리학자 중에는 신화적 색채가 짙은 단군 신화의 내용은 부정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고려후기에 단군을 국조로 숭앙하던 풍조는 조선 시대 전기까지 이어지게 되니다다.
단군에 대한 백문보의 상소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00년이 하나의 소원(小元)이 되고, 3600년이 쌓여 하나의 대주원(大周元)이 됩니다. 이는 황제(皇帝)⋅왕패(王覇)와 이난흥쇠(理亂興衰)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었으니, 곧 주원(周元)의 기회입니다.
마땅히 요순(堯舜)과 육경(六經)의 도(道)를 쫓되 공리화복(功利禍福)을 논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면 하늘(上天)이 진실로 돕고 음양(陰陽)이 때를 맞추어 국운이 길어질 것입니다”]
이승휴의 단군에 대한 견해
이승휴는 원나라 간섭기에 신진 관료로 활동하며 다양한 개혁을 주장하였고요 권문세족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휴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으면서 결국 파직을 당하였고요 이후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에서 은둔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습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통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널리 알리려 하였고요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는 일연이 지은삼국유사와 함께 단군 신화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입니다.
제왕운기에 수록된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보다 내용은 길지가 않지만
단군 신화의 원형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제왕운기에서 밝힌 단군
제왕운기에서 밝힌 단군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壇君⋅神壇樹’라고 하였는데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서는 ‘檀君⋅神檀樹’라고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부모를 환웅과 웅녀라고 한 반면에 제왕운기에서는 단수신(檀樹神)과 단웅천왕의 손녀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는 수목사상이 많이 포함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단군의 건국 연대에서 제왕운기에서는 ‘요 원년 무진(戊辰)’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이 부여와 고구려, 신라와 옥저(沃沮)⋅예(穢)⋅맥(貊)까지 연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曰雄, 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受天符印三個,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 云云. 令孫女, 飮藥成人身, 與檀樹神, 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爲王, 故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爲神, 不死故也.
제왕운기의 단군에 대한 기록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기(本紀)』에서 말하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고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이르기를 내려가서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그를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하였다.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은) 조선(朝鮮) 지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南沃沮)와 북옥저(北沃沮)⋅동부여(東夫餘)와 북부여(北夫餘)⋅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단군은)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니, 죽지 않기 때문이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는데요 이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과 유사 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의 탄생과 관련하여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南沃沮)와 북옥저(北沃沮)⋅동부여(東夫餘)와 북부여(北夫餘)⋅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 관련 내용
단군---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신(檀樹神)사이에서 출생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됨
단군에 대한 기록
단군의 기록이 있는 우리나라 문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단군 이야기가 는 전해지는 책은 고려 충렬왕시기에 나온 책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있습니다.
이외에 조선시대의 책으로는 응제시주가 있습니다.
이외에 조선시대에 지어진 고려사와 동국사략,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단군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또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비서들도 많이 있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기록한 비서들은 조선후기에 많이 나오게 됩니다.고려 우왕 때 권근이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가 단군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 하였습니다.
이때 권근은 '응제시'에 단군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이 '응제시'에 붙은 '응제시주'의 내용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응제시주'에 있는 단군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들으니 태고의 먼 옛날나무 가에 내려온 단군동쪽 나라의 땅에 임하시니때는 요임금의 시대였다고 하네.'
응주시주에 있는 동쪽 나라의 땅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보았을 때 동쪽나라라는 것입니다.
'응제시주'에 있는 단군에 대한 내용은 길이가 매우 짧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습니다.조선 태종 때 편찬한 동국사략에도 단군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요 조선 세종때 편찬된 고려사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국사략에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우고(요 임금 25년 무진년),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겼고,
나중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이것이 단군이다.'
동국사략에는 단군이 왕으로 추대된 시기가 요 임금 25년 무진년이라고 하였습니다.세종때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요 임금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이라 불렀다.'
동국사략의 단군에 대한 기록 |
신인이 태백산에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 |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으로 옮김 |
나중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됨 |
동국사략과 고려사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단군이 환웅의 아들이 아니고요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인물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사의 단군에 대한 기록 |
'요 임금 무진년에 신인이 단목 아래 내려 옴 |
나라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평양에 도읍 |
단군과 관련한 기록
단군과 관련한 기록은 제왕운기와 동국통감, 세종실록지리, 삼국유사, 응제시주등에 있습니다.
제왕운기와 동국통감, 세종실록지리의 단군에 대한 내용은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경우 단군의 탄생에 대해서 주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왕운기의 단군 관련 기록
제왕운기는 왕권의 강화를 통한 국가질서의 회복을 바라면서 지은 서사시입니다. 이승휴는 원나라 지배 하의 민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제왕운기를 저술했습니다.
이승휴가 원나라 지배 하의 민족적 정통성 회복을 위해 지은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시로 엮은 것인 데요 상권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다루었고 하권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루었습니다.
이승휴는 단군에 대해서 다음과 기술을 하였습니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의 단군부분을 해석하면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열었느냐, 제석의 손자니 이름하여 단군이라]입니다.
이승휴는 단군을 제석의 손자라고 하였고요 제석의 손자인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 나와 있는 단군과 관련한 기록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初誰開國啓風雲, 釋帝之孫名檀君.本紀曰, ‘上帝桓因, 有庶子, 曰雄云云. 謂曰, “下至三危太白, 弘益人間歟.” 故雄, 受天符印三箇, 率鬼三千, 而降太白山頂神檀樹下, 是謂檀雄天王也云云.’ 令孫女飮藥, 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據朝鮮之域, 爲王.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 皆檀君之壽也. 理一千三十八年, 入阿斯達山, 爲神, 不死故也. 竝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 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今九月山也, 一名弓忽, 又名三危, 祠堂猶在. 享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 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 無君臣.
제왕운기에 나와 있는 단군과 관련한 기록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네.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는데 환웅(桓雄)이라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땅으로〉 내려가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弘益人間]?” 라고 하였으므로 환웅은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명을 데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으니, 이분을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손녀(孫女)에게 약을 먹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게 하여 남자 아이를 낳게 하니, 이름하여 단군이라 하였다. 조선의 영역에 자리잡고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沃沮), 동북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었다.註 001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阿斯達) 산에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으니, 〈이는 단군이〉 죽지 않은 까닭이다.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단군의 죽음 |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됨 |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다른 곳에서는 이후 164년 동안 비록 부자관계는 있었으나 군신관계는 없었다고 되어 있다.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단군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이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고요 아사달산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일명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고 부르는데,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황해도의 구월산은 단군이 마지막으로 생을 보낸 곳으로 추정이 됩니다.
단군이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내용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단군이 죽은 연대는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이라고 하겠습니다.
단군의 사당은 구월산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도 있습니다.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에 단군릉을 조성하여 있습니다.
제왕운기의 기록대로 라면 단군의 시신은 황해도 구월산에 있어야 하는데요 평양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사실과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동국통감의 단군 관련 기록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내용은 동국통감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동국통감에는 단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竝與帝高興戊辰 經虞歷夏居中宸제요와 함께 무진년에 흥하여 하왕조를 거치도록 궁궐에 계시다.於殷虎丁八乙未 入阿斯達山爲神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지금의 구월산이다. 일명 궁홀 또는 삼위라고 한다. 사당이 아직 있다)亨國一千二十八 無奈變化傳桓因1028년간 나라를 향유하셨으나, 어쩔 수 없이 변화함은 환인의 부르심이라.却後一百六十四 仁人聊復開君臣그 뒤 164년 후에 어진 분이 군신관계를 다시 열었다.(一作 爾後一百六十四 雖有父子無君臣)」(혹은 그 후 164년은 부자는 있었지만 군신은 없었다고 한다.)
동국통감에서는 단군이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요 아사달 산은 지금의 황해도 구월산을 말합니다.
단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동국통감과 제왕운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서로 일치 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탄생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설명을 하였고요 단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은 1028년간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단군에 대해서 설명한 응제시주
●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應製詩註)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 응제시주입니다.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는 권근이 지은 응제시에 권근의 손자 권람이 자세히 주석을 붙여 엮은 책인 데요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응제시주는 세조 시기에 간행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은 1396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무제의 어제시 3수를 받았고요 홍무제에게 바치는 응제시(應製詩) 24수를 지었습니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이 그 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 응제시주입니다.
응제시주 |
응제시에 주석을 붙인 책 |
세조 시기에 간행 |
권근이 지은 응제시 자체와 권람의 주석 사이에는 역사 의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홍무제에게 바치는 시인 응제시(應製詩) 24수는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단군과 관련한 응제시주의 주석
권람은 응제시에 주를 달면서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 웅(雄)이 있었다. 웅은 지상으로 내려가 인간 세계를 교화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고 하였고요 환웅은 천부인 3개를 받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또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을 맡은 신을 거느리면서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응제시주에서는 곰이 인간으로 변한 것에 대해서도 잘 기록을 하였는데요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곰이 인간으로 변하여 웅녀가 된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빌어 사람 되기를 원했다.
이에 환웅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百日)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체를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었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곰은 금기를 지켰다.
그리하여 곰은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다.
곰이 인간으로 변한 것과 관련한 내용은 권람의 응제시주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한 응제시주
응제시주에서는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했습니다.
단군은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아들을 낳아 부루(夫婁)라 하였다. 그가 곧 동부여의 왕이다.
우(禹)임금이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은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요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서는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라는 권람의 주장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군의 아들이 해부루라고 하면 단군조선은 이후 동부여로 연결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사달 산신이 된 단군
권근은 단군의 최후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는데요 단군은 우임금의 하나라를 지나,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단군이 말년에 들어간 아사달은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의 구월산인데요
황해도의 구월산에는 단군을 모신 사당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권람은 응제시주에서 단군은 1048년 동안 살았다고 하였고요 단군이 세상을 떠난 후 164년이 지난 뒤에는 기자가 와서 임금에 봉해졌다고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단군에 평양에 나라를 세운후 말년에는 아사달에 들어가 아사달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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