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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고려시대 중국 도자기

by 산골지기 2021.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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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무역을 통해 수입되거나 사신들의 왕래를 통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고려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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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궁궐, 관청, 사찰, 무덤 등 전국 각지에서는 청자, 백자, 흑유자(검은 빛을 띠는 자기) 등 오대부터 송․원대까지의 다양한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고, 그 양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바다 건너편 제주도의 여러 곳에서도 발견될 만큼 고려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얘기다.

이러한 중국도자기는 왕실, 귀족, 승려 등 일종의 특권층에서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는 목적도 있지만, 재력이나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서도 이용되었다.

 

* 문공유(文公裕, 1088-1159) : 고려시대 인물로 송나라와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으며, 종일품(從一品)의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고위 관료

 

특히 중국 징더전((景德鎭) 가마에서 만들어진 푸른빛을 띠는 순백의 청백자((靑白瓷)는 송나라 황실, 귀족 계층에서 쓰일 만큼 명품 중에 명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도자기의 본고장 중국에서도 ‘천하제일 고려비색’ 이라 불릴 만큼 수준 높은 청자를 제작한 고려인들이었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미 명품으로 인식된 ‘중국도자기’를 갖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과 비교해 보아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당시 송․원대 중국도자기가 고려청자의 제작에 있어 도자기의 형태, 문양, 기법 등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7세기 유럽에서는 갖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중국도자기를 모방하여 도기를 만들고, 18세기 독일에서는 유럽 최초로 자기 제작에 성공했으며, 지금도 유럽 도자기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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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역시 파도를 타고 밀려오는 중국 도자기, 중국문화의 열풍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를 바탕으로 단지 모방이 아닌, 고려만의 취향, 미감, 사상을 예부터 토기나 도기를 만들던 전통과 도자기 제작의 신기술을 접목시켜 뛰어난 고려청자를 만들었다.

갖고자 하는 열망은 모방으로 이어지고, 모방은 새로운 결과물을 탄생시킨다.

흔히 ‘모방은 창조의 아버지’ 라는 말을 이럴 때를 두고 쓰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