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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한산도 대첩

by 산골지기 2018.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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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은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6월 10일(양력 7월 18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육지에서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7월 5일(양력 8월 11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고, 다음 날인 6일에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여 조선 수군의 전력은 55척이 되었다.

 

7월 7일(양력 8월 13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이때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서 일본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접했다.

견내량파왜병장 보면 한산도해전 당시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 : 아다케부네 36척, 세키부네 24척, 고바야부네 13척이며, 아다케부네는 전투원 60명, 노꾼 80명, 대포 3문, 철포병 30명이며, 세키부네는 전투원 30명 노꾼 40명 대포 1문 철포병 20명, 고바야부네는 전투원 10명, 노꾼 20명, 철포병 8명이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7110명이 선을 넘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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