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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

무신정권기 경주인근의 농민반란

by 산골지기 2016.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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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명종 20) 정월, 경주를 중심으로 농민들과 불만집단이 연합하여 봉기의 불길을 당겼다.

 

이들의 봉기는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3년 뒤 여름부터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청도의 운문산(雲門山)을 거점으로 한 김사미(金沙彌)와 울산의 초전(草田)을 거점으로 한 효심(孝心)이 농민군을 이끌고 적극적인 항쟁 활동을 벌였다.

 

김사미의 ‘사미’는 어린 중을 뜻한다. 이로 보아 그는 운문사의 재가승(在家僧)1) 이었을 것이다. 그는 험악한 운문산의 지리를 잘 알았을 것이다. 호거산(虎踞山)으로도 불리는 운문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경주 시내가 한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주변 지역의 움직임도 바라볼 수 있다. 운문사 입구에서부터 왼쪽에 자리잡은 운문산 정상에는 커다란 바위와 동굴들이 널려 있는데, 여기에 도둑에 얽힌 전설들이 무수히 전해지고 있다. 초전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 초전은 경주와 동해, 강원도를 잇는 통로였다.

봉기군들이 연계하여 여러 고을을 들이치고 약탈을 일삼자

중앙에서는 대장군 전존걸과 장군 이지순 등을 보내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지순은 이의민의 아들이다.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이의민이 자신의 아들을 토벌군의 책임자로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의민은 도참설 에 나오는 “십팔자가 임금이 된다”(十八子爲王)는 구절에 늘 마음을 두고 있었다. ‘십팔자’는 이(李)의 파자(破字)이다. 그는 이씨 왕조를 꿈꾸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본적지에서 농민군이 일어났으니 이들을 이용하여 신라 부흥을 핑계대며 새 왕조를 창업하는 계기를 만들려는 속셈을 지녔을 것이다.

 

이의민은 김사미와 효심에게 몰래 연락을 취해 자신의 뜻을 알렸다. 그들은 이의민에게 보물을 보내며 지원을 부탁하였다. 이지순은 농민군이 많은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보물에 욕심이 나서 의복, 양식, 신, 버선 따위 생활필수품을 농민군에 보내주었고, 농민군은 그 대가로 금은보화를 갖다 주었다.

 

이지순이 토벌군의 동정을 농민군 쪽에 알려 전투가 붙으면 언제나 농민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전존걸은 이의민의 위세에 눌려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예천에서 거듭 패전한 뒤 고민 끝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이 소문이 중앙까지 널리 퍼져 이의민에게 심한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그는 강경 진압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토벌군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상장군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아 내려보냈다.

 

농민군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관군에 대항하였으나 패전을 거듭하였다.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던 농민군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거나 항복하였다. 김사미는 토벌군 앞에 나와 항복하였으나 주살당하였다.

남은 농민군은 효심을 중심으로 저항하여 어느 정도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에 고무되어 강원도 강릉에서도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군에 항쟁하였다.

 

효심이 이끄는 농민군은 밀양 의 저전촌(楮田村)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7천 명이 죽고 패하였다.

이 전투는 농민군 항쟁사에 가장 처절한 기록을 남겼다. 남은 농민군은 여름 숲속을 헤치고 다니면서 버텼다.

1193년 12월 마침내 효심이 사로잡힘으로써 경상도 농민군의 항쟁은 끝을 맺었다.

 

약 4년에 걸친 경상도 농민군의 항쟁은 가장 치열하고 규모도 컸다.

 

비록 한때 이의민의 무신정권과 결탁하기도 하였으나 농민군의 의지는 확고하였다. 토벌군의 총사령관 최인은 도둑을 즉각 공격하지 않고 머뭇거려 경비를 소모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탕진하였고, 이로 하여 무신정권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최충헌은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죽인 장본인이라는 구실을 붙여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하였다. 이의민의 세력을 제거할 때 경주 사람들이 많이 연루되었다.

 최충헌은 집권 초기에는 여러 모순을 제거하는 개혁책을 내놓고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끝내 지난날의 무신정권의 작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동적인 탐욕으로 내달았다.

김사미와 효심의 남은 무리는 운문산과 강릉 등지에 모여들어 산발적인 저항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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