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698년에 대조영이 건국을 하였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연합하여 세운 나라인 발해는 이후 거란에게 멸망을 하게 됩니다.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연합하여 세운 나라인 발해는 모두 15명의 왕이 제위를 하였고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발해 |
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연합하여 세운 나라 |
모두 15명의 왕이 제위 |
거란에게 멸망 |
발해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은 선왕인데요 선왕시기에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지역을 망라하는 대제국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당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한 구당서에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한 갈래인데요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옮겨 와 살았습니다.
요동지방의 영주에 있는 거란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가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성곽을 쌓고 거주하였습니다.
대조영은 용감하고 병사를 잘 다루었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모여들었고 이들 세력을 규합하여 발해를 수립하게 됩니다.
구당서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옮겨 와 살았다고 하였고요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가 대조영은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였다고 했습니다.
대조영은 동쪽으로 이동한 후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게 됩니다.
당시 당나라의 실권자인 측천무후는
대조영의 발해건국에 대해서 반대를 하였고요
이해고로 하여금 토벌군을 거느리고 대조영의 군대를 정벌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대조영은 당나라의 추격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하게 됩니다.
*발해의 역대 왕
698년에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후 발해의 역대 왕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대외적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요 발해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 크게 힘을 기울였습니다.
발해의 역대 왕 |
무왕--- 당나라의 산둥반도를 공격 |
문왕--- 발해의 문물제도를 정비 |
선왕---발해의 전성기를 이룩 |
제2대 무왕은 당나라의 산둥반도를 공격하면서 당나라에 대한 공세적인 태도를 위하였습니다.
무왕에 이어 즉위한 제3대 문왕은 발해의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주로 내적인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문왕은 발해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가운데 도읍을 동모산에서 남쪽에 있는 중경현덕부로 옮겼습니다.
중경현덕부는 농경지가 넓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역이었는데요 얼마 후 북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로 다시 천도하였습니다.
이후 발해는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하는 가운데 두만강 하류 지역에 자리한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발해의 전성기
발해는 제10대 왕인 선왕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발해의 전성기를 이룩한 선왕은 내부적인 안정에 힘쓰면서 밖으로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영토 확장에도 힘을 기울였던 선왕은 흑룡강 하류 지역까지 개척하고 흑수 말을 압박하여 당나라와 말갈의 교류를 막았습니다.
북으로 영토를 확장한 선왕은 남으로는 신라 방면으로도 진출하였는데요 신라는 발해의 위협에 대응을 하여 대동강 부근에 기다란 장성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발해는 전성기를 이룩한 선왕 대에 이르러 옛 고구려의 영토를 거의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선왕시기에 발해는 북쪽 연해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습니다.
발해의 전성기를 이룩한 선왕은 문왕 때에 설치한 3경에 서경과 남경을 더하여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하는 행정구역도 완비하였습니다.
발해의 발전과 관련하여 송막기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유력한 성씨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씨를 따른다.”라는 기록을 통해 발해가 소수의 고구려계⋅말갈계 지배층과 다수의 말갈족 및 기타 종족으로 이루어진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부유한 집은 200년 넘게 편안히 살면서 흔히 정원이나 연못에 모란꽃을 심었는데 많은 집은 200~300포기에 달한다.”라는 데서 발해 부유층의 생활 일면을 엿볼 수도 있다.
발해의 쇠퇴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는 선왕 이후 제13대 왕 대현석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였고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융성은 14대 왕 대위해 시기까지도 지속되었지만 마지막 왕인 대인선이 즉위할 무렵부터 발해는 나라 안팎으로 혼란에 빠져 멸망의 시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15명의 왕이 재위한 발해는 거란에게 멸망을 하는데요 발해가 갑자기 멸망한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의혹이 있습니다.
일설에는 발해가 백두산 화산폭발의 와중에서 멸망을 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발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발해국은 연경(燕京)이나 여진(女眞)의 수도에서 모두 1500리 떨어져 있는데, 돌로 성을 쌓았고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아우르고 있다. 그 나라의 왕은 옛날부터 대씨(大氏)를 성으로 삼았다.
유력한 성씨는 고(高)⋅장(張)⋅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몇 종류에 불과하다. 부곡(部曲)이나 노비 등 성씨가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씨)을 따른다.
부인들은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대씨는 다른 성씨들과 서로 10자매라는 관계를 맺어 번갈아 남편들을 감시하며 첩을 두지 못하게 한다.
남편이 밖에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독살을 모의하여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다. 한 남편이 바람을 폈는데, 그 아내가 깨닫지 못하면 아홉 자매가 모여 가서 비난한다. 이처럼 다투어 투기하는 것을 서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므로 거란⋅여진 등 여러 나라에는 모두 창기(娼妓)가 있으며 양인 남자들은 첩과 시비를 두지만 발해에만 없었다. 남자들은 지모가 많으며 날래고 용감함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심지어 “발해인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 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그 나라의 왕 대인선(大諲譔)을 멸망시키고, 그의 호적장부에 있는 발해인 1000여 호를 연(燕)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는 토지를 지급하여 부세를 바치게 하고, 국경의 시장에서 왕래하며 무역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으며, 싸움이 있을 때는 선봉으로 이용하였다.
천조(天祚)에 난이 일어나자 그들은 무리지어 고국에서 대씨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금나라가 토벌할 때,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귀족인 고씨가 집을 버리고 와서 항복하고 허실을 말해 주어, 성이 나중에 함락되었다. 거란이 강제 이주시킨 백성이 늘어나 5000여 호에 달하였고 훌륭한 군사가 3만 명이나 되었다. 금나라는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몇 년 동안 산둥[山東] 지방의 국경을 지키도록 보내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불과 몇백 집만 보내다가 신유년(辛酉年)에 이르러 모두 몰아 보내자, 이 사람들은 크게 원한을 품었다.
부유한 집은 200년 넘게 편안히 살면서 흔히 정원이나 연못에 모란꽃을 심었는데 많은 집은 200~300포기에 달하며 어떤 것은 수십 줄기가 무더기로 자랐는데 모두 연(燕) 지역에는 없는 것이라 하여 십수 천 혹은 5000전에 사갔다.
그들이 살던 옛 땅은 모두 거란에 귀속되었다. 옛 동경(東京)에 유수(留守)를 설치하였는데, 소주(蘇州)와 부주(扶州) 등이 있었다. 소주는 중국의 등주(登州) 및 청주(靑州)와 서로 마주하고 있어서, 큰 바람에 따라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기도 한다.
*발해의 한시
발해시대에는 한시도 발달을 하였는데요 발해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한시로는 양태사가 지은 밤에 다듬이소리를 들으며[夜聽擣衣聲]라는 시와 왕효렴이 지은 한시인 봄날 비를 보니 정(情)자가 생각나서 짓다[春日對雨情字)가 있습니다.
양태사가 지은 한시인 밤에 다듬이소리를 들으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밤에 다듬이소리를 들으며
서리 하늘 달 밝은데 은하수 빛나
나그네는 돌아갈 생각 깊도다.
긴긴 밤 시름에 겨워 오래 앉아 있노라니
홀연 들리는 이웃 아낙의 다듬이소리
바람결 따라서 끊어질 듯 이어지며
밤 깊어 별이 기울도록 잠시도 멎지 않네.
고국을 떠난 후로 저 소리 못 듣더니
지금 타향에서 들으니 소리 서로 비슷하네.
왕효렴의 시
왕효렴의 시 다섯 수는 모두 일본에서 지은 것입니다.
발해의 문학가인 왕효렴이 지은 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봄날 비를 대하여 정(情)자를 얻다
주인이 관청 주변에서 잔치를 베푸니
손님은 몹시 취하여 상경을 기다리네.
아마도 우사(雨師)가 임금님의 뜻을 알아챈 듯
달콤한 맛과 아름다운 향기로 나그네 정 씻어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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