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은 압록강의 서북지역에서 융성하던 민족이었는데요 고려와는 초기부터 적대관계를 가졌습니다.
거란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고려는 이후 3차례에 걸쳐서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거란의 1차 침입은 고려 성종시기에 있었는데요 이 때에는 서희가 외교담판을 하여 전쟁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가 외교담판을 한것과 관련하여 고려사 서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서희(徐熙)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蕭遜寧)의 진영에 가 통역관을 시켜 서로 인사하는 예(禮)를 물었는데, 소손녕이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貴人)이라 마땅히 뜰에서 절하여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에게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법이지만 양국 대신이 서로 보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리오” 하였다.
이렇게 두세 번 말해도 소손녕이 받아들이지 않자, 서희가 노하여 관사로 돌아와서는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이 기이하게 여기고는 당(堂)에 올라와서 서로 예를 행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서희가 영문(營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함께 뜰에서 서로 읍(揖)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하고는 동서(東西)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그대들이 침범해왔다.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바다를 넘어 송(宋)을 섬겼으므로 이제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서 바치고 통교한다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토의 경계로 말한다면 상국(거란)의 동경(東京)은 전부 우리 지역 안에 있는데 어찌 영토를 침범한 것이라 하는가?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또한 우리의 지역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둑질하여 차지하고는 교활하게 대처하고 있어 길의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심하니 조빙의 불통은 여진 때문이다
.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성과 요새를 쌓고 도로를 만들면 어찌 교빙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신의 말을 천자에게 전하면 어찌 가엾이 여겨 흔쾌히 받아들이지 아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는 기운이 매우 강개하므로 소손녕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사실을 정리하여 아뢰었다.
거란의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가 이미 화해를 청하였으니 마땅히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하였다
*여진족의 발전
여진족은 지금의 만주지역을 무대로 하여 활동을 하였는데요
압록강의 북부와 두만강의 주변지역에서 많이 활약을 했습니다.
두만강의 주변지역에서 많이 활약을 했던 여진부족은 야인여진으로 불리었는데요
조선을 자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여진족은 처음 아구타가 부족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세웠습니다.
아구타가 부족을 통합하여 세운 금나라는 몽고족에게 정복을 당하게 됩니다.
몽고고원에서 일어난 몽고족은 동북아 지역으로 진출을 하면서
여진족이 세운 도시인 지금의 베이징 지역을 점령하고 여진을 완전히 제압하게 됩니다.
몽고에게 정복을 당했던 여진은 이후 몽고가 쇠약하자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후금을 세우게 됩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
몽고족이 쇠퇴하는 틈을 타서 누르하치는 여진의 부족들을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여진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누르하치가 태어났을 무렵에 여진의 부족은 해서여진 4부,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 5부이 있었고요 두만강 북쪽에는 야인여진 4부가 있었습니다.
여진의 부족 |
해서여진 |
압록강 북쪽 건주여진 |
두만강 북쪽 야인여진 |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 5부족은 누르하치가 1583년에 군대를 일으켜 1589년에 다른 여진의 부를 굴복시키고 통합을 이룩하게 됩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업적
누르하치는 여진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습니다.
누르하치가 여진의 부족들을 통합하여 세운 후금은 이후 청나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확립하였고요 농엄과 상업을 장려 하였습니다.
팔기 제도는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와 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기구였습니다.
청나라 말기인 19세기가 되면서 팔기군은 무용지물이 되긴 하지만 팔기군은 청나라 초기에 대륙을 장악하는데는 혁혁한 공훈을 세웠습니다.
*고려를 위협한 여진
여진족은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고려를 위협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가운데 고려전기에는 여진에 대해 사대외교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시기에 윤관은 별무반이라는 군대를 편성하여 여진을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윤관은 별무반을 편성하는 동시에 지금의 함흥평야 주변지역에 9개의 성인 9성을 쌓았습니다.
윤관이 여진을 정벌한 것과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윤관(尹瓘)이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벼슬을 옮겼다.
그가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니 강성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니 마땅히 군사를 쉬면서 대비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어서 가히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세우고 문무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과 노비 및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군(神騎軍)으로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도탕군(跳蕩軍)⋅경궁군(梗弓軍)⋅정노군(精弩軍)⋅발화군(發火軍) 등에 속하게 했다.
나이 20세 이상인 남자 가운데 과거 시험을 보는 자가 아니면 다 신보군(神步軍)에 소속시키고, 서반(西班)과 모든 진⋅부(鎭⋅府)의 군인(軍人)은 4계절마다 훈련시키고, 또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았다.
마침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저축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12월에 왕이 위봉루(威鳳樓)를 방문하여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여 파견하였다.
을유일에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병사를 주둔하였다. 군사의 수가 대강 17만인데 20만이라 하였다. 병마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2주에 나눠 보내고, 여진 추장을 속여서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와서 명을 들으라" 하였다.
추장이 이를 믿고 고라(古羅) 등 400여 명과 함께 오니, 이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출동시켜 이를 섬멸하였다
만주 문자 제정
만주족은 청나라르 세운후에 만주어를 기록하기 위한 만주 문자를 확립했습니다.
여진의 부족들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여진족이 자신의 언어를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현상을 안타깝게 여겼고요 이러한 상황에서 여진어를 표기하는 문자 체계인 여진 문자를 확립하게 됩니다.
만주족 대부분이 여진문자를 사용함에 따라서 한족의 언어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 됩니다.
만주족의 체제 정비
건주여진 시절부터 명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정부 기구를 구성하고,
조정과 6부를 두었습니다.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후, 그대로 명나라의 6부를 접수하여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만주족이 미개 상태를 청산하고 문화 민족으로 발돋움하려면,
농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반농반목ㆍ수렵-채집 민족이었던
만주족을 농경 민족화하려고 했습니다.
만주족의 상업
만주족 경제는 물물교환이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여진의 부족들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화폐도 도입했습니다.
여진족은 만주의 경제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화폐를 주조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화폐경제의 도입은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여진족의 화폐 경제는 명나라를 점령한 후에야 널리 발전을 하게 됩니다.
만주족의 외교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몽골에게 멸망을 하는데요 누르하치는 이를 교훈 삼아 몽골족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후금이나 청나라 황제는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자칭했는데요 자신들에게 순응하는 몽골 부족들을 후금 체제로 끌어들여 팔기에 소속시켰습니다.
몽골 기병들은 만주병들이 쇠퇴한 19세기까지도 청나라의 온전한 전투력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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