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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중국사

송(宋)나라와 금나라

by 산골지기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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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510국의 분열기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하였고요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여진족이 세운 국가인 금나라는 이후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화북지방을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몽고족에서 멸망을 하게 됩니다.

몽고족은 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는 가운데 1234년에 금나라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송나라
송나라는 후주(後周)의 절도사 출신인 조광윤이 건국하였습니다.

후주(後周)의 절도사인 조광윤은 진교역(陳橋驛)에서 왕위를 찬탈하였고요

960년에 황제로 등극하면서 송나라 시대를 열게 됩니다.

송나라와 관련한 역사기록은 송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송 태조 조광윤은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 세력을 제압하고 안정된 통일국가를 건설하게 됩니다. 조광윤은 통일국가를 건설한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문신(文臣) 관료체제를 확립하게 됩니다.

송 태조 조광윤은 재상권을 약화시키고 군정, 민정, 재정을 분담시켜 각기 추밀원, 중서성, 삼사에서 관할하게 했습니다.

송나라 태조시대에 지방관은 모두 문관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송나라 시대에 모든 관리의 권한은 철저히 분산되었고요 이러한 권한의 분산은 황제권의 강화로 귀결됨으로써 송나라 시대에는 황제의 독재적 권력이 수립이 되게 됩니다.

 

이후 송나라는 지나치게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추구하다 군사적으로 매우 허약해 지게 되고요 북쪽에서 흥기한 여진족의 압박을 받아서 멸망을 하게 됩니다.
송나라때에는 군사조직이 부병제에서 직업군인 제도인 모병제(募兵制)로 바뀌었고요 황제권이 강화되었습니다.

송나라의 태조는 문치주의 중앙집권체제로 화북의 안정을 도모한 후 963년부터 976년까지 강남의 10국을 점령하였고요 태조의 동생 태종이 통일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송나라의 태조
문치주의 확립
963년부터 976년까지 강남의 10국을 점령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구축

송나라는 강남 지역의 개발로 농업생산의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고요 차, 소금, 술 등의 전매제도를 시행하여 재정 수입을 확보하게 됩니다.

 

송나라 시대의 문화

송나라 시대에는 상점들이 성 안의 각 곳에 진출해 성내 전체가 번화가로 변했습니다.

송나라 시대에는 상업이 발달을 하는 가운데 도시에는 시장들이 즐비하게 됩니다.

또 송나라 시대에는 도시 구조가 개방되고 도시민들의 생활이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시와 희곡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는 ()’가 널리 유행하면서 송대 서민 문화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남송시대에는 학문이 매우 발달을 하는 가운데 주희가 성리학을 성립시키게 됩니다.

 

'전연의 맹약'
송나라의 태종은 오대(五代) 시기에 거란()에게 뺏긴 연운(燕雲) 16()를 되찾기 위해 요를 공격하였습니다.

송나라의 공격으로 인하여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는데요 송나라는 요에게 계속 패하자 방어태세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후 송나라와 거란은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전연(澶淵)의 맹약'은 서기 1004년에 체결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려가 통일국가를 수립한 직후입니다.

송나라 태종 시기
화북출신과 강남출신 관료의 대립으로 인한 붕당이 형성

송나라 태종 시기에는 화북출신과 강남출신 관료의 대립으로 인한 붕당이 형성됨에 따라 정권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신종(神宗)이 죽은 후 철종(哲宗)이 어린나이에 즉위하자 북송은 당쟁에 휘말리게 되고요 이러한 가운데 정치사회는 더욱 부패하게 됩니다.

이후 송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국가인 금의 침입을 받아 휘종(徽宗), 흠종(欽宗) 두 황제와 3,000여 명의 황족, 고관이 잡혀가는 대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내부 분열로 약해진 북송은 1127년에 멸망하는데요 화북지방을 잃고 강남으로 피신한 고종이 지금의 항저우인 임안에 도읍을 정하면서 남송시대가 전개가 되게 됩니다.

 

중국문화의 틀을 지켜나갔던 남송

송나라는 후기에 북방민족인 여진족의 압력을 받게 됩니다.

여진족은 부족을 통합한 후 금나라를 세우게 되는데요 여진족이 세운 국가인 금나라의 압력을 받아 강남으로 이동한 남송은 화북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북송 때보다 영토 면적이 4분의 3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디.

그러나 남송은 강남 지역의 개발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민족에 항쟁하면서 중국문화의 틀을 지켜나갔습니다.

금나라와의 전쟁을 두려워한 남송의 왕인 고종은 항복하고 화친을 맺자는 화의론을 받아들이면서 화의론에 반대한 악비를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였습니다.

화친을 맺자는 화의론을 받아들인 남송은 금나라와 군신관계가 되어 자손대대로 신하의 예를 지켜야 하는 화의를 맺게 됩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한 여진족은 누르하치가 부족들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팔기군을 통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고요 뛰어난 기병을 확보하면서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성장을 하게 됩니다.

여진족은 화북지방을 정복한 후에는 본거지를 지금의 베이징 지역으로 옮기게 됩니다.

금나라의 세력이 강해지는 가운데 고려는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삼전도 굴욕과 관련한 비석

이후 고려의 서경파 귀족들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반대하면서 묘청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금나라의 멸망

13세기 초에는 몽골족이 일어나 서하(西夏)를 멸하고

남송과 동맹하여 금을 정벌하고자 제의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남송은 몽골족과 연합하여 1234년 금을 멸하였습니다.

강남으로 이동한 남송은 몽골정예부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몽골군에 대한 수비를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몽고족에게 멸망당한 금나라는 이후 누르하치가 다시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하게 됩니다.

 

나라의 이름을 청나라로 바꾼 후금

누르하치가 다시 부족을 통합하여 세운 후금은 이후 나라의 이름을 청나라로 바꾸고 중국전역을 정복하게 됩니다.

후금은 이후 나라의 이름을 청나라로 바꾼후 조선도 침략을 하여 조선을 굴복시키게 됩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당시 남한 산성에거 마지막까지 항전을 하였지만

결국 인조가 한강변에 있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경기도에 있는 남한 산성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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